두 손이 발개질 정도로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여러 갈래로 낙하하는 물줄기의 끝에서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김이 피어올라, 희뿌연 안갯속에 온몸이 가려졌다. 시야마저도 흐릿해지는 것이, 실체가 사라지는 것만 같다.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 좋았다. 피부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맡기고, 굽은 어깨와 등을 어루만져줄 것을 부탁했다. 어떤 것도 개의하지 않고 기꺼이 듣는 물이 좋아서 살풋 미소를 지었다.
슬슬 더위가 밀려와 재빠른 손놀림으로 머리를 감고, 조금 까칠한 샤워타올에 바디워시를 덜어 거품을 내었다. 작고 여린 아이로 돌아간 듯 맑개 갠 향기가 좋았다.
크림처럼 부푼 거품을 몸 이곳저곳에 묻히니 뱃속 깊은 곳을 긁어대던 괴물의 손톱자국이 하얗게 덧칠되어 말끔히 사라졌다. 뒤늦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끄러웠던 머릿속 입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몸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만 같다.
가을 무렵에 보았던 잠자리의 날개를 떠올렸다. 망사처럼 얇은, 힘을 주어 잡으면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리 약하지만은 않은 날개. 어릴 적 손끝에 앉은 잠자리를 보면 곧 결혼을 앞둔 신부가 떠올랐다. 새하얀 드레스 같아서, 저런 날개를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모르는 소원을 빌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 그것을 이제야 가진 것만 같다. 거품과 뜨거운 물로 텁텁한 때를 한차례 벗겨내고 나니, 몸이며 마음이 전부 투명하게 비친다. 이렇게 약하고 방심한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집어삼켜지지는 않았다.
거듭 얼굴을 스치던 샴푸 거품 탓에 붉게 충혈된 눈을 거울 속에서 마주 보았다. 물기가 어린 듯했다.
닦아내는 것도 잊고, 등 뒤의 타일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만 같은 그 몸을, 선홍빛이 어린 두 눈을, 꾹 다물어진 입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날것의 상태였다. 젖은 머리카락의 끝으로 진주알 같은 물방울 몇 개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욕실 안에 다시 한기가 들이닥치니 정신이 돌아와, 서둘러 몸을 씻어내고 주섬주섬 새로운 옷을 챙겨 입었다.
저녁 내내 몸을 담아두고 있던 방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었다.
반쯤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
오늘 우울상점에 새로 들어온 물건은, 거품을 얇게 펼쳐 만든 반투명한 날개.
물이 닿으면 녹아 흩어지지만, 가볍고 자유로운 감각만큼은 하루종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