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그림과 글을 좋아했던 나는 종이와 펜을 친구로 두고 살았다.
백색 종이 위에 볼펜이 굴러가던 순간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머릿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검푸른 색의 잉크를 사랑했다. 한계가 없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세상. 바라던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
내가 만들어내던 것은 거창한 작품이 아니었다. 형태를 갖추고 제대로 태어난 것은 많지 않았다. 어떤 것은 아무렇게나 그어진 직선과 구불구불한 곡선에서 끝났고, 어떤 것은 그저 여러 색깔을 품은 점에서 끝을 맺었으며, 그려져야 할 곳이 그려지지 않은 채로 마무리를 지은 것도 많았다. 비단 그림뿐만이 아니라, 글도 그렇게 가벼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훅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하고 가느다란 몸.
종이는 내가 펼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품었다. 펜촉의 작은 공을 굴려 가며 긋는 선마다 미세하게 패인 모양을 보았을 때. 그렇게 작은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잉크를 품을 때가 그랬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그것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전부 끌어당기고 자신을 물들였다. 한 번 그어진 이상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색은 흐려질지라도 미세한 흔적이 남았다. 하얀 수정테이프로 감춘다 해도, 그것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덮는 것일 뿐 완전히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힘주어 새긴 만큼 강하게 남았다.
하얀 종이는,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덧칠되던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몸 위에 그려진 작은 새를, 꽃과 나무와 몇 줄의 삐뚤빼뚤한 글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물론 단지 무생물에 불과한 그것이 나의 글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펜을 굴리며 남색의 잉크를 남길 때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톡 건드리곤 했다.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쓰는 도구들과 소통을 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사람이 쓰는 언어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단지 나의 움직임에 따라 끌려가는 것일 뿐이지만, 생각을 담아내고 감정을 담아내다 보면 어쩐지 희미하게 생명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생각하고 받아내고 그려내는 그 과정이 즐거웠다. 손과 펜이 물러난 뒤의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가슴 안에 쌓여 있던 퀴퀴한 먼지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마음의 밑바닥을 볼 수 있었던 찰나의 시간이었다.
오늘 우울상점의 선반에 진열된 것은, 기억을 머금은 펜과 속삭이는 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