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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by 이지원

차라리 무엇이라도 느꼈던 때가 더 낫지 않았나, 싶어.


열두 살 무렵부터 마음을 갉아먹어 오던 것이, 정확히 십 년이 지난 지금 몸까지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안쪽에는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살과 근육을 파먹고 있는 것이다.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기에 서 있는 나는 다리를 움직일 힘을 잃었고 감각을 잃었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허울뿐인 웃음을 짓는 법도 잊었으며 가장 활동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 시기에 대부분의 관계를 끊어내고 스스로마저 끊어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을 벌이면서도, 어떤 감정마저 느끼지 못한다.


내가 정말 병자인 걸까. 그러한 의문마저도 의미가 없다. 실제로도 병자가 맞다고, 이제는 아니라고 부정할 시기도 꽤나 지났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므로. 내가 맡은 역할과 대부분의 관계를 놓아버리기로 한 이 시점에서, 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 옆을 보아도 꽃이 있고 나비가 날개를 움직이는 이곳이야. 그게 봄이야. 저 사람들을 봐. 틀림없이 살아있어.


병신 같은 것. 가끔씩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던 소리가 이제 내 마음까지 다가오는 것을 알았을 때, 핏줄이 이어진 타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홧김에 익어 뜨겁게 터져 나오던 그 목소리가 이제 자신의 안까지 물들이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한참 전에.


그때 내가 무언가 도움을 받으려 했다면,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내가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합리화일 뿐인 걸까. 병처럼 보이는 거적때기의 뒤에 숨은 채로 지금 둥 뒤에 선 꽃과 나무마저 마주하지 못하고 있어. 정신 차려, 곧 여름이 올 거야. 네 뒤에 선 꽃은 곧 시들고 파란 이파리만이 서 있을 거야. 모든 것들이 다 똑같아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파아랗게 물들어 버릴 거야. 사람은 떠나고 죽을 때까지 혼자 남은 채로 삶을 이어갈 거야. 남을 끌어들이지 마. 이 여름에, 끝나지 않을 열대에 남을 끌어들여선 안 돼. 너무나도 덥고 끈적해서 그들은 너를 밀어낼 거야. 매끄러운 살결이 녹아 붙은 채로, 입술도 눈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그러질지 몰라. 너만의 열대에 남을 끌어들이지 마.


내가 나의 머리를 헤집고 어깨를 끌어당기고 발로 짓누르며 살기 위한 헤엄을 친다. 밑에 깔린 내가, 가끔씩은 올라와 다른 말을 내뱉는다. 무엇을 하기로 했었는지, 누구와 함께하기로 했었는지, 전이었다면 정신이 퍼뜩 들 만한 것들을 필사적으로 늘어놓는다. 정신 차려, 이것 좀 봐. 향을 맡아봐. 너 이거 좋아했잖아. 입술에 한 번이라도 대 봐. 삼키지 않아도 좋아. 아가, 봄바람이야. 봄이 왔어.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봄이 왔어...


마른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라앉는 몸을 주무른다. 두툼한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을, 이제는 옷도 입기 싫은지 완전히 맨몸으로 누워 있는 사람을. 아직 매끄러운 살결과 거기에 남아있는 희미한 체온을 짚어 본다. 저주파의 이명으로 가득 찬 귀와 벌건 손톱자국이 남은 손등을 쓰다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동자에 스스로를 비추어보고서야 나는 완전히 스스로를 놓아줄 수 있었다. 이제는 괜찮다는 말로 덮기도 어려울 정도로, 너의 몸과 마음에는 짓무른 상처가 가득 피어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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