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영화와 사진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술가들의 사고와 관점이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이라 몹시 설레었더랬다. 당시 나에게 그들은 교수라는 직업적 존경심과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분야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실체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 잔상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소설 속 화자인 닐에게 교단 앞에 선 엘리자베스 핀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한다. 핀치의 강의 철학은 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 후 20여 년간 만남을 이어오며 존경과 사랑의 대상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두 번의 약속을 잇따라 취소한 핀치가 부고를 알리며 그 만남은 끝이 나지만 그녀는 닐에게 자신의 서류와 책을 처분하는 일을 맡긴다. 닐은 핀치가 남긴 자료를 통해 그녀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 스토아철학의 핵심을 구현한 인물의 생각과 태도를 자신의 바탕으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고 핀치가 자신에게 그 기록을 남긴 이유를 깨닫는다. 그래서 핀치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율리아누스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책의 2장에서는 율리아누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각각 다른 평가와 논리가 첨예하게 다뤄진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배교자, 이교도 사회에서는 반대의 평가를 받는 율리아누스.
닐은 율리아누스를 공부하다가 핀치의 강의를 함께 듣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본인게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핀치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교수에 불과했던 것을 깨달으며 과연 나는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그녀의 자서전을 쓰는 일을 중단한다.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상반된 시각으로 평가받는 율리아누스와 핀치처럼 우리는 나와 타인을 결코 다 알 수가 없다. 객관적인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각자의 주관이 우연히 얽혀 서사를 만들고 인연을 만든다.
철학적인 질문과 복잡한 이론들로 여러 번 문장을 곱씹게 하는 책이다. 무게감 있는 문장들은 여러 가지 다른 질문들로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영국문학의 거장이자, 맨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반스의 이 책은 소설인지, 철학서인지, 역사서인지 경계가 모호한 독특한 장르가 아닐까 싶다. 여러 번 되돌아가 읽어야 하는 책이고 그 수고만큼 생각 거리들이 넘쳐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