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도발적인 대답
대중들은 얼이 빠진 짐승과도 같다
“대중의 습성은 얼이 빠진 짐승과도 같다. 사나운 본성을 지니고 숲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육장 속에 갇혀 노예처럼 사육되고 있다가 뜻밖에 자유로워져서 들판에 방목되면 어리둥절해 버린다. 그래서 먹잇감이 어디에 있는지, 보금자리인 동굴이 어디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다른 짐승의 먹잇감이 되어버린다. 타인의 명령하에 사는 데 익숙해진 대중은 바로 그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꽤 도발적인 첫 문장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마치 대중(군중)들을 비하라도 하는 듯, 적나라하게 대중들의 습성을 적어 내려 간다. 처음으로 그의 가감 없는 문장들을 보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든다. 우리는 가끔 너무 적나라한 진실이 눈앞에 있으면,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어도 결코 그것을 직접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구태여 우리의 민낯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 사람들은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만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능과 습성을 잔인하리만치 샅샅이 파헤친다. 우리가 사회활동을 하며 마치 원래의 내 모습인양 쓰고 있는 가면들을 우리의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던지고, 현실을 보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그렇게 그는 담담히 우리의 내면을 해부한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넘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무덤덤하게 써 내려가는 그의 솔직한 생각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16세기의 금서 군주론
: 그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
성소수자들이 당당하게 공개연애를 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는 시대이다. 누구든 자유롭게 누군가를 저주하고, 그 저주로 인해 꽤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자유가 존중받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조차 읽는 순간 약간의 거북함이 느껴지는 책인데, 16세기의 사람들은 도대체 이 책의 내용들을 읽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할 당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한때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활약했지만, 메디치 가문의 귀환과 함께 하루아침에 해임당했고, 심지어 반역 혐의로 고문까지 당했다.
그렇게 처참한 몰락을 겪은 그는 시골에 은둔하며 한 가지 목표를 품었다. 권력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남달랐다.
자신이 직접 정치 무대에 복귀하는 대신, 권력의 기술을 가장 날카롭게 정리한 책을 써서 새로운 어린 군주에게 헌정하기로 했고, 그 책이 바로《군주론》이었다.
이 책은 당대의 지도자들에게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결국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대중의 본성과 군중의 심리를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그는 대중이 쉽게 조작될 수 있으며,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두려움에 쉽게 휘둘린다고 말했다. 또 그는 군주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으며,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거짓과 선동을 이용하고, 두려움을 통해 복종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를 통치하는 군주들이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들은 다른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니다.
대중들이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만약 일반 대중들이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대중들을 쉽게 다룰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중들은 적당히 '멍청'해야 군주들이 배부르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대중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군주론에서 얻는 삶의 지혜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단순한 권력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냉정한 원리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을 벗겨내어 보여준다. 이 책이 단순한 군주의 지침서가 아니라 삶의 철학으로 확장될 수 있는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다룬 핵심이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인간’과 ‘권력을 좇는 인간’, 그리고 ‘권력을 견뎌야 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군주이고, 동시에 피지배자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냉정한 시선이 출발하는 곳은 날것 그대로의 세상과 본능에 충실한 민낯의 인간이다.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 낭만과 품격이 들어설 자리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비상식’이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껏 경험하지 않았던 좀 더 공격적이고 과감한, 그래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말한다. 심지어 ‘왠지 그런 나쁜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일상적 금기에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코 선하지도 않고, 비상식적이며, 도덕과 윤리는 허울뿐인 이 현실에서 우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해 정해진 단 하나의 정답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어떠한 대단한 사상도, 종교도, 이념도, 철학도 그 역할을 해줄 수 없다.
오롯이 개개인이 각자의 삶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고 창조해야 하는 물음일 뿐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들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 맞는 정답을 찾는 여정에서 큰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적나라한 욕망은 평소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설사 상대방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갈등이 만들어내는 상대방의 흔들리는 눈빛, 날카로운 목소리, 거친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민감한 정보들을 알아챌 수 있고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말의 함정에 빠진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보다, 사랑을 증명하는 행동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에게 시간은 쓰지 않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일삼는다면, 그의 말이 아닌 행동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기꾼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코 돈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결국 가치 없는 실체에 투자와 후원을 유도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돈을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절대로 그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입발린 말로 마음을 사려고 한다. 무엇이든 칭찬하고, 시야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말로는 누구보다 나를 존경한다고,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다가 들통나곤 한다.
말은 언제든 조작될 수 있지만, 행동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지표다.
그러니 사람을 평가할 때, 그들의 행동을 보라.
모든 새롭고 신선한 생각들은 한때 저항에 부딪혔고,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안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격적이고 과감한 사고들은 기존에 통용되던 상식이 무심코 건너뛰었던 논리의 빈틈을 메워주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하기 힘든 일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은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기존 질서에서 이익을 누리던 사람들은 개혁자를 적으로 간주하며, 새로운 질서에서 이익을 볼 사람들은 소극적으로만 지지할 뿐이다. 변화는 언제나 거센 반발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저항을 어떻게 다루고 극복할 것인가이다. 변화를 위해 싸울 용기가 없다면, 결국 변화 없이 안주할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는 늘 상식의 뒤편에서 삶을 승리로 이끌어갈 새로운 무기를 찾아내려고 했다. 이제까지 상식의 무기로 싸워오면서 늘 힘이 부치고 승률이 떨어졌다면, 이제 한 번쯤 다른 무기를 쥐어 보자. 그래야 이제까지와는 다른 싸움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세가 출현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노예 상태로 탄압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상식과 도덕을 기본적인 삶의 원칙으로 여긴다. 선조들이 걸어왔던 케케묵은 길을 그대로 걷지 않으면 튀어나온 못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보통'의 사람에 속하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며 배척하려는 성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성향은 진화적으로 유리한 생각들이지만(결국 '평균'에 속해야 자연선택되어 생존할 수 있었던 수천 만년 전 우리의 선조들을 생각해보면), 우린 더 이상 그러한 원시적인 진화의 산물에 지배받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진화의 산물인 '본능'을 극복하고 반대로 행동해야 더 유리할 때도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식 시장에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공포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
이 말은 결국 우리 유전자 속에 내재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오히려 과감하게 매수하고, 대중들이 너도나도 달려들 때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광기에 올라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라는 말이다.
물론 무조건 대중들과 반대로만 한다고 성공한 것은 아니며, 애초에 '공포'가 무엇이고, '뉴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면 이 말은 잘못 해석할 여지가 많지만, 투자에 있어서 본질을 꿰뚫는 구절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한때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애플, 테슬라, 구글 같은 기업들도 기존 질서에 도전했기에 시대를 바꿀 수 있었다. 이는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며 안주하는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가? 우리는 모두 이 질문 앞에 서있다.
“일단 나라에 큰 고통이나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긴급조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힘든 상황이 계속되거나 영원하진 않을 것이라고 대중을 설득하고 희망을 주는 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사실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지만,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주목하는 것, 이 관점의 전환이 우리 삶의 여정에 결정적으로 이로운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시민들은 자기 재산이 파괴당하는 것을 보면 참을성을 잃는 데다가 포위가 지속되면 이기심이 발동하여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진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강력하고 용기를 가진 군주는 그의 시민들에게 그러한 고난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고 믿도록 설득하고 희망을 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자들을 교묘하게 처리함으로써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강조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행복도 좋지만, 고통이야말로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철저히 독자를 '군주'로 상정하고 기술한 책이기에, 원문에서는 군주의 입장에서 나라에 큰 재난(고통)이 들이닥쳐 대중(우리의 내면)들이 혼란에 빠져 나라가 어지러울 때 대중들을 진정시키고 안정을 되찾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충분히 개인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인간은 그토록 나약하다. 그렇기에, 고통을 맞이했을 때,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게끔 각자의 알고리즘을 개발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 순간에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정도의 습관만 만들어 놓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선동하는 자들', 즉, 우리 머릿속에서 마치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떠드는 그 '부정적인 생각들'을 빠르게 처단해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고통은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다. 뭔가를 시도하고, 세상과 부딪히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통은 필연적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는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인들이 설파했던 진리이다. 예수, 부처는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이를 알 수 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 누군가 꿈을 이루기에 앞서 만물의 정기는 언제나 그 사람이 그동안의 여정에서 배운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싶어하지. 만물의 정기가 그런 시험을 하는 것은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네. 그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 말고도, 만물의 정기를 향해 가면서 배운 가르침 또한 정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세”
또, 맹자는 고자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삶은 결코 반짝거리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있지 않다. 그보다는 어둡고 음침한 색깔을 가진 고통이 배경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이 더 눈에 잘 띌 뿐이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 사람들은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만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친다.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법은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로는 많은 경우에 불충분하기 때문에, 후자에 의지해야 한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와 약속을 맺은 이유가 사라졌을 때는 신의와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또 지켜서도 안 된다.
“여우의 방식을 모방하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우다운 기질을 잘 위장해서 숨기는 방법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가끔은 짐승이 될 결심을 해야한다. 이 결심은 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온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이란 사악하고, 군주인 당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자신과 그들이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들은 신의를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만책을 써서 인간을 혼란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맞서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힘보다 욕구하는 힘이 언제나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반목해 이 일어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악설을 믿지는 않는다. 인간은 날때부터 선한 면도, 악한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분법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이며, 실재와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은 어떤 양 극단의 중첩 상태에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불교의 사상이며, 현대과학의 정점인 양자역학에서 기술하는 세계의 진리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타고난 악한 면들은 유독 묵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배신하고, 폭력성도 가지고 있으며, 교묘하게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하고, 남의 성공을 배아파한다. 약한자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생기듯, 이러한 인간의 간사한 면도 분명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질이 태초부터 그렇게 완전한 선이라면, 법과 제도가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학습했다. 전쟁, 차별, 고문, 강탈, 강간, 살인, 테러, 마녀사냥, 비리, 배신, 타락, 범죄는 항상 인류와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지구를 멸망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인류가 선해서가 아니다. 누군가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본인도 파멸함을 알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비단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크고 작은 악을 행한다. 남을 질투하고,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고, 생각에 머물 뿐이지만 누군가를 때리고 혹은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오랜 시간 쌓아온 우정도 사랑도 한 순간에 배신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어떻게 다스리고, 우리는 이 악한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 개인의 차원이든,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의 입장에서 보든 결과는 일맥상통한다.
법과 제도와 윤리라는 시스템이 없다면, 누구나 분노가 느껴지면 폭력과 살인을 행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스템을 잘 구축했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사실, 마키아밸리는 그 시스템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했고, 실제로 군주로서 권력을 유지하고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특정한 시스템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철저히 이용하고, 배신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다. 그 시스템을 개인의 삶에 맞게 해석하면 '카리스마' 또는 '존경'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카리스마'나 '존경'은 꽤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만만하게 보이지 말라'는 말이다. 인간적인 면모도 많고, 정도 많고 사람이 선해보이지만, 크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적으로 두면 정말 피곤할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느낀다. 그곳이 바로 친근함과 존경과 더불어 모종의 두려움도 섞여있는 오묘한 지점이다.
경제학에서 유명한 실험 중,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 실험에서는 협력과 배신에 대한 수많은 전략 중 'Tit for Tat(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 평화롭고 성공적인 사회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전략임을 보여준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 누군가 배신하면, 보복하라.
- 배신자가 다시 협력을 요청하면, 협력하라.
이렇게 했을 때 가장 많은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배신한다.
- 배신을 당하고도 보복하지 않는다면, 계속되는 배신으로 인해 생존하지 못한다.
- 배신을 막기 위해서는 보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즉, 두려움을 심어야 한다.
- 한 번 보복을 당해본 사람은 그 두려움으로 인해 다시 배신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 그렇기 때문에, 배신자가 다시 돌아와 협력을 요청하면, 용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뿐만 아니라, 마키아밸리는 신하들이 군주를 배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로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충분한 재산을 주고,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게 만들라고 한다.
“인간이란 부모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그들의 재산이 절대적으로 지켜질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라고 권고한다. 자본주의가 자리 잡히기도 전에 이미 마키아벨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사상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인간은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보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를 해칠 때 더 주저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감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이 되며 공포를 잘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든다.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인간은 사랑하는 이를 배신할 수 있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이를 해칠 때는 망설이게 된다. 단, 이 두려움은 공포정치가 아니라 ‘존경’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방법은 단순하다.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가볍게 보이지 않는 것. 이렇게 존경받는 존재가 된다면, 사랑받기 위해 애쓸 필요조차 없다."
“군주는 너무 자비로워서는 안 된다. 지나친 자비로움은 방종을 초래하며, 이는 무질서를 부른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다수를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일 수도 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보호막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들은 신의를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만책을 써서 인간을 혼란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맞서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마키아밸리는 이렇듯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기술하며, 이러한 본성을 군주로서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기술한다. 이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 보면, 각자의 삶에 있어서 노예가 아닌 군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적당한 존경이나 카리스마를 자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으며, 심지어 그 부모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타인에게 사랑받기 원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강인한 주인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일일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시민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공포가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두려움과 존경을 의미한다. 타인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길러야 한다. 부드러운 면만 보여서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냉정함과 결단력이 없으면 결국 이용당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군주처럼 살아야 한다.
“질서가 잡힌 국가와 현명한 군주는 귀족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또 시민들이 만족하도록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주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귀족들의 호의에 의해서 군주가 되었을 때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대중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당신이 그들을 보호함으로써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박해를 예상했던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되면 그에게 더욱 애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군주는 부하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그를 우대하고 재산을 누리게 하며, 그를 가까이 두고 명예와 관심을 수여하는 등 그를 잘 보살펴야 한다.”
“지도를 그리는 자들은 아래로 내려가서 높은 산의 지형을 파악했으며, 반대로 산 위로 올라가 아래의 낮은 곳을 파악했다. 마찬가지로 시민의 성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될 필요가 있고, 군주의 성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이 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호의로 군주가 된 사람은 그들의 환심을 계속해서 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주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민들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역경에 처했을 때 속수무책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훌륭한 군주는 시민들이 만족하도록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주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마키아밸리는 군주로서 가져야 할 덕목 중 두려움과 존경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고, 그 신뢰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그리고 그의 통찰은 몇 백 년이 지난 현대사회에서도 대부분 적용되는 본질적인 내용들이라는 점이 놀랍다.
삶이라는 게임의 키는 결국 균형 잡기이다. 무엇이든 어느 한쪽의 상태만을 고집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강함과 약함, 행복과 불행, 승리와 패,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이성과 감성, 부자와 빈자, 삶과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낸 허구의 양 극단이다. 실재하는 세계의 대부분은 이들 사이의 중첩적인 부분에 존재한다.
비슷한 논리로 한 국가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면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명랑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존경'이라는 한쪽 면과, '부드러움과 온정'이라는 다른 쪽 면을 균형 있게 발휘해야 한다. 어느 하나가 좋은 상태인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키아밸리는 그렇게 신하들에게 세심한 배려(특히 재산)를 통해 마음을 사고, 신하들이 그 재산을 잃을까봐 느끼는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한다.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 같은 배려조차 결국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라는 본성을 활용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를 하기 위해서 군주는 시민의 입장에 서봐야 한다고도 말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본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영어 단어 중 'Understand'라는 동사는, '아래에 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아래에 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밸리는 성공적인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주를 섬기는 신하와 시민들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군주의 성격이나 능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흥했다가 내일은 망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중략~ 나는 군주의 대처 방식이 시대의 상황에 적합할 때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 실패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참을성 있게 행동하고 시대와 상황이 그의 처신에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면 그는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상황이 변하면, 그는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이런 변화에 맞추어 행동하는 방법을 알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거나, 아니면 과거에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항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느린 사람이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대의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운명은 변화할 것이다.”
절대로 정확한 예측도, 추적도 할 수 없는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단 하나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즉, 영원한 것은 절대 없다.
하다못해 도덕적 기준이나 상식이라는 것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려는 과감한 사고 없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흑인 노예들이나 여성들을 말 그대로 '물건'처럼 사고파는 행위들을 생각하면 과거의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기를 바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군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처럼 들린다. 심지어 냉전은 더 미친 짓으로 보인다. 어째서 30년 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핵 대학살을 불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이렇게 보면, 현재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상식과 이념에 대해서도 감히 이것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권에 대한 그 믿음도, 백 년 뒤에 우리 후손들에게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세상의 법과 관습과 도덕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키아밸리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고려해서 가끔은 짐승이 될 결심을 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도덕과 윤리조차 가끔은 어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위험해 보이는 사상인 것은 틀림없다. 모든 대중들이 마키아밸리의 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행한다면, 사회는 혼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들은 깊게 고민할 가치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맞게 우리의 태도나 생각을 시시각각 변화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에 안주한다면 도태될 뿐이다. 항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진리를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마음 한편에 새로운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즐겁게 지내게나. 두려워하지 말고 운명과 당당히 맞서며, 하늘의 운행과 시간의 흐름, 인간의 상황이 자네 앞에 어떤 것을 펼쳐놓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말고 그것과 힘껏 싸우게나."
마키아밸리가 말했듯,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은 인간의 이성보다는 짐승의 본능에 더 가깝다. 이러한 곳에서 오직 도덕과 윤리만을 고집하며 너무 우아하게만 인간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면 몇몇 짐승들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조차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일 수도 있다. '선'의 기준은 항상 바뀌어왔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국가가 금주법을 제정하면 한 순간 음주는 유흥과 여가가 아닌 범죄와 악이 된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한국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은 악이 되었다. 심지어 뉴스에서 한 개인의 카드 내역을 공개하기까지 한다. 대중들은 신나게 그들을 비판한다. 마치 자신은 한없이 선한 사람인 것처럼.
도덕적 우월감은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이는 군주의 입장에서 대중들을 조종하기 쉬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특히나 이러한 면, 즉, 마키아밸리가 말하는 '노예의 습성'이 도드라지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언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할 수 있고, 이것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온전히 자유의지로 결정한 선택이나 생각조차 누군가의 영향일 수도 있다. 권력을 가진다면,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몇 천, 몇 만 명의 사고를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가짜 뉴스와 사기와 거짓이 판치는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여론 조작, 진실 은폐, 여론 형성은 더 이상 음모론이 아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각 기업의 이득을 위해 우리의 사고방식을 조종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본인들의 권세 유지를 위해 갈등을 조장할 수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노예들은 쇠사슬이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는 시선 때문에 묶여 있다"라고 말했으며, 고대 로마시대에 군중들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전략은 "노예들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남녀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과 같은 현상들이 온전한 우리 개개인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온 결과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를 지구 생태계 피라미드의 꼭대기 위에 올려놓은 것은 '협력'하는 힘이다. 우리 인간 개개인이 사바나 초원에 던져진다면, 몇 시간도 안 돼서 사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협력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허구를 믿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우리는 돈, 종교, 이념, 국가, 기업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를 믿을 수 있고, 이는 낯선 이들과의 손쉬운 협력을 낳는다. 이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성공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사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진화해 온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협력은커녕, 서로 편을 갈라서 물고 뜯느라 정신이 없다.
마키아밸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하는 사상들은 거북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힌트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혹은 시스템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고 있는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