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우리를 계속 일하게 만들려고 누군가가 무의미한 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속으로는 딱히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사실 속으로는 내 직업이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느끼면서,
어떻게 일터에서의 존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It’s as if someone were out there making up pointless jobs for the sake of keeping us all working.
Huge swaths of people spend their days performing tasks they secretly believe do not really need to be performed.
How can one even begin to speak of dignity in labor when one secretly feels one’s job should not exist?
2015년 1월경, 알 수 없는 게시자에 의해 런던의 지하철 전역에 게재된 광고 문구이다.
누군가의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 문구는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조용히 관통했다.
이 문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SNS에서 수백만 회 이상 재게시되며 빠르게 바이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구를 보고 가슴속에 큰 동요가 일어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문구는 단순한 회의감을 넘어,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노동의 본질을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우리 삶과 노동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물음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수많은 직장인들이 아침에 눈을 뜨고 기계적으로 일터에 나간다. 학창 시절 순수한 꿈과 열망을 가지고 있던 자도, 그렇지 않은 자도, 결국 대부분 똑같은 곳에서 비슷한 일들을 하러 간다.
거대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나사의 역할을 한다.
우리 사화는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일정 규모 이상의 법인에서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인 직원이 선호된다.
심지어 몇몇은, 아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저 추상적인 '전문성'을 원한다.
자신이 무엇을 전문으로 하고 싶은지, 자신의 탤런트는 무엇인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들은 그저 '전문직'을 원한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웃긴 말이다.
"너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전문직이 되고 싶어"라는 말은, 마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만 같이 들린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을 공허하게 하는 것은 일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고돼서'가 아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내가 만든 무언가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고통이다.
우리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는 일이 실제로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그 일이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안겨주는지 되묻는 사람은 드물다.
그 까닭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외면해 왔던 알 수 없는 공허함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그렇게 되면 그간 믿어왔던 모든 게 무너져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잘만 다니고 있는 그들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들이 겪는 공허함과 회의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보통 일정 규모 이상의 법인에 고용되면 누구나 겪는 패턴이 있다. 회의를 위해 존재하는 회의, 보고를 위한 보고, 오로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무의미해 보이는 작업들이 반복된다. 단순한 코드 입력 노동, 끝이 보이지 않는, AI가 단 몇 분만에 읽고 요약하고 쟁점을 도출할 수 있는 두꺼운 판결문 밤새서 읽기, 데이터 짜 맞추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질 등등. 이 집단이 마치 자본주의가 낳은 거대한 괴물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윗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깊은 회의와 공허의 늪을 헤쳐나가며 몇 년째, 십몇 년째 잘 다니고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들은 이것이 재미있나? 저들은 이 일을 하며 가슴이 뛰는가? 저들은 이 일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나? 저들은 이 일의 의미를 진정으로 찾은 건가?
아니, 사실 그들은 그저 무뎌진 것이다.
그저 나쁘지 않은 거래를 한 것뿐이다. 억대 연봉과 각종 복지들, 법인카드로 제공되는 실리적인 현금성 혜택들을 대가로 그 정도의 회의감과 공허함을 참아내는 것쯤이야, 어른이라면, 지켜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편익이 큰 거래이다. 나쁘지 않은 삶을 넘어, 좋은 삶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상과 사회구조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생산성이 극대화된 사회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중화된 사회에서는 어떨까?
실제로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이들은 발전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이러한 미래를 위한 제도는 이미 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저 멋지고 신기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집안일을 도와준다거나,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는다거나 하는 정도의 수준의 파급력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것이다. 사회제도, 이념, 관념, 화폐제도, 보이지 않는 계급 피라미드, 직업의 가치와 의미 등을 완전히 뒤바꿀 수밖에 없는 거대한 변화이다. 산업혁명이나 인터넷 혁명이 우리 삶과 사고방식을 바꾼 정도의 수준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물리적으로 인간의 노동과 생산성 자체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말 그대로 완전히 말이다. 이것은 공상과학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온톨로지 기업 팔란티어의 AIP CON을 보면,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 기술기업이든 전통적인 제조기업이든 상관없이, 이전에 한 분야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전문가 직원들이 모여 머리를 싸매고 1주일을 고민해야 했던 데이터 분석 과정을 팔란티어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단 몇 초, 몇 분만에 끝냈다는 CEO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온다.
휴머노이드 로봇도 마찬가지이다. Figure Ai, 테슬라와 같은 기업에서 생산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이미 BMW 차량 생산 공장, 테슬라의 기가팩토리 등에 투입되어 일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휴식도, 노동조합도, 인권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은 AGI가 실제로 도래한 그 미래가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노동, 일, 직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더 이상 '생산성'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 확실하다. AI와 로봇이 인간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라는 식의 뻔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우리 사회의 구조나 기존에 우리가 변하지 않을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상당히 많은 개념들이 무너질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의 CEO들은 이미 이를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은 노동 생산성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개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한다.
샘 알트먼도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일론 머스크는 더 나아가 '보편적 고소득'이 실현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GDP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그런 미래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노동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그들의 말을 무작정 믿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가 변화하는 정도와 속도를 고려해 보면 그리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확률로 당분간은 나도 여전히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그리고 이 업계에서 일을 할 것이다. 굳이 지금 내가 이 시스템에서 받고 있는 혜택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러한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슷한 알고리즘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50, 60세대들은 그게 가능했다. 이 정도로 거대한 변혁의 시대를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미래가 오기 전에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세기의 변화를 맞이하는 시대이다. 전 인류에게 있어 큰 전환점을 찍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해당 없는 이야기이다. 인류는, 분야를 불문하고 생산성 측면에서 모든 것이 우리보다 뛰어난 개체를 지구에 탄생시켰고, 그들이 자연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당장 지구 안에 수백만, 수천만 혹은 수억 마리의 거대 육식 공룡들을 DNA 조작을 통해 부활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모든 국가에 긴급 비상사태가 선포될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겨야 한다. 확실한 건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변화, 거의 파괴에 가까운 변화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을 세상에 내놓고, 그것들을 대량생산하고, 심지어 자가번식하게끔 지구의 환경을 구축해 놓는 행위는, 그렇게 공룡을 풀어놓는 행위와는 또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 변화의 속도와 정도를 우리는 결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 기존의 방식대로 명문대에 진학하여 대기업에 입사해서 자산을 불리고 배부르고 등따시게 가정을 꾸리는 그 과정 자체가 전부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의 평균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곧 지나갈 것이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구시대적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주장했듯, 몇 년만 지나도 그 새로운 세대들은 우리의 이러한 관념과 사고방식을 비웃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중세의 종교전쟁, 근대의 러다이트 운동을 전혀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라는 굳건해 보이는 시스템 또한 그렇고, 지금의 교육, 화폐 시스템이라는 개념, 가족에 대한 개념, 일에 대한 관념 등 대부분의 것들도 피해 갈 구멍은 없다.
지금은 한 인간 개체가 아닌, 이 지구에서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의미 자체를 되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도 전문직, 명문대, 대기업 같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지극히 미시적이고 의미가 퇴색된 가치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삶을 산다면, 머지않아 엄청난 실존적 공허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의 철학과 나침반이 없으면 어떠한 생산성 있는 노동도 결국 무가치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에서 어떤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부분이 비어있는 변호사는 그 부분이 채워져 있는 생산직 제조업 노동자보다 결코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들은 그저 수많은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때가 되면 갈아 끼우면 그만인, 그런 도구 말이다.
직장보다는 직업을 찾아야 하며, 직업보다는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노동과 생산, 또는 직업 그 자체도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