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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비 Oct 17. 2024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떤가요?

슈만, 어린이 정경

오늘은 슈만의 피아노 소품집 <어린이정경>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이 제목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떠신가요? 엄청난 기교가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곡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으시죠? 이 곡은 슈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곡이라고 합니다. 총 30곡을 작곡했지만 그중 13곡만 <어린이 정경>이라는 표제를 붙여 출판했습니다. 아마 그 곡들이 작곡가 자신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그 의미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고 싶지만 워낙 옛날 사람이라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만 이 소품집은 슈만이 직접 제목을 붙인 곡들이어서 그저 추측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랄까요. 슈만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깊게 남아있는 기억은 뭘까요?


1. 미지의 나라들

2. 이상한 이야기

3. 술래잡기

4. 조르는 어린이

5. 만족

6. 큰 사건

7. 트로이메라이(꿈)

8. 난롯가에서

9. 목마의 기사

10. 약이 올라서

11. 거짓말

12. 잠자는 어린이

13. 시인의 이야기 


이 곡을 작곡했을 때 슈만은 20대 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음악학자인 베르너는 "어린이 정경은 젊은 마음을 간직한 어른들을 위한 곡집이다"라고 말했는데요,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제목을 보니 어린이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조합은 아닌 것 같죠. 조금 철학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어린이의 나이 범위는 어떻게 될까요? 제 생각에는 미취학 아동부 터해서 초등학생까지의 나이, 즉 5세~12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문득 든 생각인데 만약 여러분들이 슈만처럼 <어린이 정경>이란 이름으로 13곡을 작곡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어떤 제목을, 어떤 감정을 가진 음악을 만드실 건가요? 슈만이 <어린이 정경>을 작곡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중 가장 기억나는 일, 좋았던 상황과 슬펐던 상황을 다 꺼내 봤을 거라 상상하니 만약 저라면, 혹은 여러분이라면 어떤 주제가 나올까 싶네요. 


쉬운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이 마냥 행복하고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첫 번째로 친구에게 놀림받아 크게 상처받았던 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고, 두 번째로는 시골에서 느꼈던 우울한 황혼, 눈썰매 타던 일, 거미줄 잠자리채, 징그러웠던 개미집 같은 게 떠오르네요. 좋았던 일은 뭐가 있을까요. 기억에는 없지만 사진 속에서 자전거를 타며 개구 짓게 웃는 제 모습이 떠오르고, 언니 따라 놀이터 다니던 일, 인형을 선물로 받았던 일 등이 떠오르네요. 꿈에서 로봇이 쫓아와 제 팔을 자르는 꿈을 2 연속 꾼 것도, 두 번째에서는 제가 로봇을 좇아버린 것도 결코 잊을 수 없었네요. 



그럼 일단 슈만의 <어린이 정경> 한번 들어보실까요~?







1. 미지의 나라들

여기에 나오는 미지의 나라는 어떤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곳인 듯합니다. 아이들은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신나는 모험을 상상하기도 하죠. 제 시각에서 봤을 때는 '미지'라는 것이 부정적으로 느껴졌는데 선율이 장조로 밝아서 오히려 좀 의아했답니다. 어린이의 순수한 호기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하네요.



2. 이상한 이야기

이 곡은 3박자 계열의 곡으로 힘찬 느낌을 줍니다. 번역이 '이상한'이야기로 되어있지만 a curious story로 호기심 있는, 궁금한 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첫 번째 박자에 있는 꾸밈음, 약박인 3박자에 강박을 주는 당김음, 중간에 16분 쉼표가 들어가 호흡을 짧게 한 부분을 보면 궁금함이 가득한 어린이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술래잡기

그 시절에도 술래잡기는 존재했었나 봅니다. 술래잡기할 때 느껴지는 긴장감을 단조(minor)로 표현하고, 신나게 통통 튀는 느낌을 스타카토와 악센트, 그리고 빨간 박스로 표시한 스포르찬도 피아노(그 음악 특히 세게 친 후 즉시 여리게)를 통해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4. 조르는 어린이

무엇인가를 바라는 어린이는 옆을 따라다니면서 빨리 그것을 달라고 떼쓰죠. 슈만은 그런 어린이를 상당히 아름답게 그려놓은 것 같습니다. 슈만은 어린이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사실이었나 봐요. 저라면 이렇게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ㅎ



5. 만족

이 곡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가진 아이의 신남과 행복함이 물씬 느껴집니다. 기쁨에 못 이겨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은 아니지만 기쁨이 계속 잔잔한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아요. 주 선율이 처음에 맨 윗부분에 나왔다가 곧 중첩되며 내성에서(왼손) 한번 더 나오고 있는 것처럼요.



6. 중요한 사건

이제 f(포르테)가 등장하면서 힘찬 기운이 전해져 오고, 악센트와 함께 하강하고 있습니다. 왼손부의 강한 옥타브가 한층 곡을 생기 넘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었을지 궁금해지네요~




7. 트로이메라이(꿈)

트로이메라이는 이 <어린이 정경>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7번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플랫조가 나왔는데 플랫조는 샵(#) 조보다 더 온화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이곡 같은 F장조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가장 잘 받는 것 같아요. 이 어린이의 꿈은 아주 편안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가 봅니다. 행복한 가운데 잠에 들어 꿈속에서도 행복한 아이를 묘사한 것 같아요.



8. 난롯가에서

저는 지금까지 벽난로가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만, 가끔 시뮬레이션게임을 했을 때 항상 벽난로를 설치하곤 했어요. 벽난로가 있으면 집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분위기가 확 변하잖아요.  불을 보며 멍 때리는 것도 다들 한 번쯤 해보셨을 거예요. 그런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을 상상하면서 이곡을 들어보세요.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서 뜨개질하는 할머니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요리하는 엄마,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가 있는 어느 날 밤.



9. 목마의 기사

경쾌한 리듬과 함께 목마를 탄 기사가 등장했습니다. 아무래도 장난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3박 리듬에서 당김음을 사용했고, 왼손과 합쳐져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리듬이 만들어졌습니다. 



10. 약이 올라서

이 곡은 제목 번역이 조금 애매한데요, 음악을 들어보시면 약이 올라 짜증이 잔뜩 난 어린이를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영어로는 Almost Too Serious로 오히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어요. 



11. 거짓말

이 곡도 영어로는 Frightening로 무서운, 놀라운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파란색의 느린 부분과 빨간색의 빠른 부분이 대조되는데 특히 빠른 부분은 앞 상황에 안 맞게 익살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파란색 부분에서 진지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빨간색에 이르러서 다 거짓말이라고 장난치는 것 같은 모습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이라는 제목도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12. 잠자는 어린이

이 곡은 초반에는 악센트가 붙은 저 리듬을 통해 어린이가 순간적으로 잠에 떨어졌다가 깨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몸이 움찔하거나 깜짝 놀라곤 하니까요. 중간에 노란 부분에서 조가 바뀌는데 아마 이쯤 돼서 아이가 잠에 빠져들어 평온한 꿈 속에 있는 것 같네요. 


특이한 것은 맨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다시 원조로 돌아와 앞부분이 비슷하게 반복되는데, 이때는 악센트가 없습니다. 빼먹고 악센트를 안 그린 것은 아닐 테고 뭔가 슈만이 상상했던 바가 있었겠지요? 선잠에 들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모습 같기도 하네요.



13. 시인의 이야기 

난해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시인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실 <어린이 정경>은 12곡을 모은 모음곡이었는데 후에 한 곡을 더 추가하여 13곡이 된 것입니다. 그 곡이 아무래도 이 마지막 곡이겠죠? 슈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떤 모습으로 장식하고 싶었을까요? 어떤 모습을 덧붙이고 싶었을까요?







연주 전공자로서, 예전에는 곡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작곡가와 그 곡을 쓰게 된 배경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연주자가 더 그 곡의 배경과 작곡가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그때는 그게 왜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 곡을 하나의 음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처리해야 할 하나의 미션이라고 생각된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수많은 배경을 가진 수많은 곡들을 탐구하면서 오히려 '나'에 대해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음악을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내 것이니까요. 여러분도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들어보시면서 자신만의 어린 시절 장면을 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 든요. 그럼 다음 주에 다음 편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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