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Op.16 No.4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은 총 6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곡들은 라흐마니노프가 기차 여행 도중 돈을 도둑질당해서 돈을 구하기 위해 빠르게 작곡해야만 했어요. 경제적 사정도 안 좋았던 데다가 여행 도중 돈까지 잃었다니, 생각만 해도 낙담과 두려움이 느껴지네요. 이렇게 빠르게 작곡해야만 했음에도 라흐마니노프는 매우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냈는데요, 오늘 다룰 곡은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No.4입니다.
라흐마니노프, 하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울증'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바로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쓴 곡이었죠. 그런데 이 '악흥의 순간'은 우울증을 얻기도 전에 쓰인 초기 작품임에도 배경이 배경인지라 음악이 그리 밝지가 않네요.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의 실패로 우울증을 얻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이전에도 이미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이 제 느낌이랑 찰떡이었거든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도 물론 좋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유난히 코드가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즐겨 들었죠. 그것이 제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거든요. (위로라기보다는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드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제 심정을 이해해 주는 곡이라 '위로'라고 표현해 봤습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제 최애 작곡가가 되었는데요. 피아노 협주곡은 사실 전공자들이 연습할 일이 별로 없어요. 워낙 큰 곡인 데다가 오케스트라 반주 또는 피아노반주가 필요하거든요. 그렇지만 <악흥의 순간> 같은 적당한 길이의 괜찮은 퍼포먼스를 가진 곡들은 학기 중에 써먹기 아주 적합하죠. 그렇게 저 또한 <악흥의 순간>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4번이 매우 끌렸습니다. 역시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악흥의 순간> 4번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폭풍 같은 곡이에요. 작은 파도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은 수준의 거대함이 느껴지죠. 이 곡은 정말 듣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휩쓸리기 시작하는데 연주자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스트레스를 토해내기 딱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이 곡을 화(火)가 매우 많은 시절에 연주했는데 그걸 녹여내기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이 곡도 제 최애곡이 되었죠...ㅎㅎ
오늘은 잡설이 좀 길었죠~ 제가 애정하는 곡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분의 연주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한번 감상해 보세요! (손가락도 엄청 긴데 저렇게 빨리 돌아가는 게 신기합니다.)
이곡은 같은 페이즈를 반복하면서 층층이 쌓여가며 더 큰 파도를 만들어냅니다.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힘이 별로 없는 연주자는 감당하기가 힘들 지경이에요. 이렇게 발전되어 가는 형태를 악보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Presto는 매우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음악 시작부터 이미 달리라는 지시를 달아놨어요. 거기다가 ff(매우 세게)도 떡하니 있습니다. 윗부분은 비어있지만 저음부의 왼손파트가 아래에서 분위기를 잡아줍니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수준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오른손도 왼손과 같이 옥타브 위에서 똑같이 노래하네요. 당연히 왼손 부분만 있는 것보다 음량이 커지겠죠?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고 하네요.
이전의 많은 부분은 생략했지만 세게 불던 바람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는 그런 부분이었습니다. [그림 3]에서 또 뭔가 지시가 많죠? 아까 [그림 1]에서는 빠르기말이 Presto였는데 지금은 Piu vivo(더욱 힘차고 빠르게)로, 셈여림은 ff에서 fff로 변하면서 더 강해진 파도바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콩나물들도 잘 보시면 < 와 비슷한 기호가 붙어있는데 이를 악센트라고 합니다. 그 음을 특히 세게 치라는 용어죠.
이번에는 Prestissimo로 Presto보다 더 빠르게 하라고 쓰여있습니다. 게다가 셈여림도 f가 네 개나 붙어있습니다. 사실 악보에서 자주 보이는 기호는 아닙니다. ffff(포르티 시시시모)라니,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치라는 건지. 아마 힘닿는 만큼 아주 아주 세게 치라는 뜻이겠죠. 저는 힘이 달려서 그만큼 소리를 못 낸 게 좀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저 Prestissimo와 ffff를 유지한 채로, 또 악센트까지 찍으면서 점점 하행합니다. 피아노는 윗부분이 얇고 높은 소리, 아랫부분은 무겁고 낮은 소리가 나죠. 그 아랫부분을 열심히 찍으면서 빠르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낮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죠. 마침내 E옥타브를 찍고 마무리되네요. 강렬합니다.
영화관처럼 음향을 크고 빵빵하게 한 채 들으면 이 음악에 압도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잠시 스트레스가 날아가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경험상 약간 감정을 해소시켜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끝부분까지 들어보면 어떤 해방감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파도라고 비유했지만 불태워버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감정을 해소하려면 그 감정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게 느껴지는 곡을 찾아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이 장르에 장벽이 느껴지시겠지만 듣다 보면 클래식은 그 감정의 폭이 매우 깊어서 가끔은 그 감정에 나를 던져 넣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 저도 그렇고 도파민에 쉽게 중독되는데 이런 도파민은 어떠신지..^^
다음 주는 어떤 곡을 해볼까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호로록 볼 수 있는 그런 곡이 저는 좋은 것 같아요. 웬만하면 작곡가가 겹치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가면 갈수록 저도 잘 모르는 작곡가가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