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창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누가 이렇게 예쁜 단어들을 조합해 지명으로 만들었을까. 한음 한음 입안에서 읊조리면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태안이 숨겨 둔 보물 ‘파도리’는 파도 소리가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원면에 속하니 간절함을 품은 바다란 뜻일까.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어촌마을 파도리는 모래사장이 아닌 작은 조약돌로 이루어진 몽돌해변이다. 비포장 된 비탈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해안은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파도 소리는 어찌나 낭랑하고 청명한지 우렁차게 밀려와 두 귀를 시원하게 씻겨 준다. 해변 가까이 내려가니 출렁이는 물살을 입은 몽돌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질반질 윤기가 흐른다. 몽돌들은 크기와 색깔도 다양해 작은 것은 콩알 크기부터 동전 크기까지 세상에 예쁜 돌은 여기 다 모인 것 같다.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실룩 올라간다. 겁의 오랜 시간이 모난 돌들을 굴리고 굴려 모서리들이 부서지고 떨어져 옹골찬 몽돌을 만들었다.
우리 삶도 세상이란 험난한 바다에서 누군가에게 치이고 부딪혀 상처 입고 구르면서 내면이 차돌처럼 단단해진다. 그렇게 몽돌이 되어 둥글게 섞여 살아간다. 잠자리 날개로 바위를 닳아 없애는 시간이 일 겁이라는데 파도리는 때 묻지 않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시원이다.
모래사장을 힘없이 빠져나가는 가벼운 소리와 달리, 몽돌 틈을 지나는 소리는 퉁명하고 힘차다. 서늘하고 우렁찬 파도 소리는 아직도 뾰족하게 날 선 것들을 다듬는 중이다. 언젠가 닳고 닳아 먼지로 산화될 때까지 굴리고 굴리는 소리는 계속된다.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활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해변 끄트머리에 기이한 해식동굴이 있다. 흙 한 줌 없는 기암절벽에 송림으로 뒤덮인 동굴은 장구한 시간의 침식으로 얕게 파여 있다. 밀물 때는 동굴로 가는 길이 막혀 자칫 갇힐 수 있기에 썰물 때를 잘 맞춰 들어가야 한다.
거친 파도는 모난 돌멩이를 굴리고 굴려 둥글게 만들고 세찬 바람은 암벽을 조각해 커다란 동굴 두 개를 내었다. 파도와 맞선 흔적은 코끼리 다리를 닮은 튼실하고 막강한 기둥 하나를 남겼다. 세찬 물살과 비바람이 오랜 세월을 걸쳐 다듬은 조각품은 거칠고 투박해 보인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신비가 두 개의 창을 내었다.
잠시 햇빛을 피하러 창 안으로 들어갔다. 선명한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를 또렷이 경계 짓고 아득한 곳에 떠 있는 섬 조각들이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인다. 해변 끝까지 밀려왔다 떠나는 잔물결이 다시 몰려온 파도와 부딪혀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킨다.
발밑 몽돌들 사이 하얀 조개껍데기가 보인다. 마모된 패각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손톱만큼 작은 조각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매끄럽게 갈려 반짝인다. 원래의 빛깔과 무늬가 닳고 해진 뿔소라 하나를 귓가에 가져가니 깊은 파도 소리가 나선형 골을 타고 흘러나온다. 마치 바닷속 저기가 나의 고향이라는 듯 텅 빈 몸이 공명을 일으켜 상실의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나는 실향의 하얀 조각들을 주워 있는 힘껏 물제비 떠 푸른 파도에 실려 보냈다. 네가 있던 곳. 그 아득한 그리움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