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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종말, 안전한 멸종을 향해

by 퇴B


1950년대, 행동학자 존 칼훈은
한 가지 질문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세상에서도
생명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쥐들에게 유토피아를 만들어주었다.
먹이도, 물도, 공간도, 온도도 — 모든 것이 완벽했다.
굶주림도, 천적도, 질병도 없었다.
그곳은 분명 ‘천국’이어야 했다.

처음엔 평화로웠다.
쥐들은 번식했고,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하지만 개체 수가 늘어나자
공간이 좁아지고 관계가 뒤엉켰다.

어느 순간부터 쥐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약한 개체를 괴롭히고, 새끼를 버리고,
무의미한 싸움이 반복됐다.

그리고 사회는 붕괴했다.

칼훈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개체들을
Beautiful Ones라 불렀다.

그들은 싸우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고, 번식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자기 몸을 핥으며
상처 하나 없는 털을 유지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버렸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감정을 버렸다.
그렇게 완벽하게 단정한 몸으로,
그들은 조용히 멸종해 갔다.

칼훈은 말했다.

“문제는 자원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다.”



풍요는 생명을 살리는 조건이 아니었다.
고립과 무관심이 쌓이자
그들의 사회는 스스로 무너졌다.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 생명을 해쳤던 것이다.


---

오늘의 인간 사회는
그 쥐들의 낙원과 닮았다.

모든 것이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은 점점 더 외롭다.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부딪히지 않는다.

불편한 대화보다 침묵을 택하고,
사랑의 위험보다 혼자의 평화를 고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우리는 점점 더 무해한 존재들이 되어간다.

분노는 댓글로,
고독은 콘텐츠로,
사랑은 이모티콘으로 번역된다.
모두가 멀쩡하지만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

Beautiful Ones는 그래서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의 완벽함은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니라,
죽어 있음을 감추는 화장이었다.

그들은 결국,
상처받지 않으려다
사라져 버린 존재들이었다.







진짜 유토피아는 타인 안에 있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역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본다.

한밤에 곤히 잠든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마알갛게 환하고 어여쁜 얼굴들.

모두가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은 채,
타인에게 닿을까 봐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무해하고, 무익한, 아름다운 사람들.



사라질 미래를 향해 —
각자의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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