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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는 달빛 아래에서 배신한다

by 퇴B


번역이란, 배신의 기술이다.
틀려야 닿고, 어긋나야 통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배신자가 되지 못했다.



어떤 말들은, 뜻을 바꾸지 않고는 도착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언제나 조금씩 배신을 품고 있다.

그 배신 덕분에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며 이해라는 착각이라도 해본다.


번역가는 배신자다 (Traduttore, traditore)


이탈리아 속담 중 하나다.

유음중첩을 사용한 언어유희적 레토릭일 뿐이지만,

번역가들로선 웃지 못할 말이다.


아니, 나더러 배신자라고?

하면서도 화는 내지만 마음 한편이 뜨끔할 테니까.

왜냐면 번역가야말로 잘못인 줄 알아도

매일 오역의 담을 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그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달이 아니기도 하더라니까?


평범한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영어 선생 시절,

“I love you”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번역한 제자에게

“일본인은 그런 말을 쓰지 않소.

그냥 ‘달이 참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나 해두시오.”

라고 했다는 거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 없이 사랑을 고백하게 만든,

그건 번역인가, 오역인가.

만약 번역에서는 오역이었더라도

그 말에는 일본인의 정서가 녹아 있었다.

그 말이 해야 할 감정의 일을 해냈다면

그건 이미 단순한 의미의 번역을 초월한 의도의 번역에 성공한 예다.

그래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다.


결국 좋은 번역이란,

원문에 갇히지 않고 ‘오역의 담’을

수시로 넘나드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데드풀>의 한 장면이 그랬다.

웨이드 윌슨이 연인에게 말한다.


“I’m fine.”

“What’s ‘fine’? ‘Fine’ is a four-letter word.”

(‘괜찮아’가 뭐의 줄임말인지 알아? ‘F’로 시작하는 네 글자 단어지.)


황석희 번역가는 이 대사를 이렇게 옮겼다.


“‘괜찮아’가 뭐의 줄임말인지 알아?

‘괜’히 ‘참’다가 ‘아’작 난다.”


이 한 줄은 진짜...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정서 시스템’을 번역한 수준이다.

원문의 의도인 ‘fine은 fine이 아니다’를

한국 정서의 맥락 안에서 완벽하게 ‘오역’해냈다.


그건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 구조를 해독한 신내림이었다.

이쯤 되면 황석희 님은 번역가가 아니라,

번역가들의 반역가이자 — 배신자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배신’이 불가피한 이유가 드러난다.

언어가 다른 나라의 문을 통과할 때,

그 문은 늘 조금씩 다른 세계로 열리기 때문이다.


corn이 옥수수인 줄 알고 흰머리 날 때까지 살았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선 밀도 corn이라니.

같은 단어라도 나라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실재를 가리킨다.


이게 딱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Language-Game)’이다.

우리는 ‘추석 보름달’ 게임을 하는데,

쟤들은 ‘사랑의 짝대기’ 게임을 하고,

난 ‘요리’ 게임을 하는데 쟤들은 ‘생존’ 게임을 한다.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룰도 다르고, 형식도 다르다.

그리고 그 룰과 형식이 바로 “세계”다.

그 담을 넘나들어야만,

말 자체가 아닌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게임 안에서만 의미를 구성한다.

어떤 연유로 일본인들의 달에 ‘사랑’이 깃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달이 예쁘다로 고백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살고 있다.

그럼 달은 사랑에 대한 거짓(false)이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른 게임의 규칙일 뿐이다.


그러니 완벽한 원본 따위는 없다. (데리다)

모든 의미는 끝없이 미끄러진다.

그 ‘차연(Différance)’의 공포 앞에서

해석은 언제나 주관적인 지경(知境)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단순한 단어의 번역만큼은 AI가 더 빠르고 정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정확함 때문에

AI는 결코 ‘배신자’가 될 수 없다.


글자와 글자 사이, 그 골목 같은 좁은 미로를 일부러 헤매는 일—

그건 투명한 AI는 하지 못한다.


배신자는 언제나 인간이다.

속이 검은 인간만이,

그 미로를 일부러 헤매며

서로 다른 세계의 담을 넘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 나면 밥 한번 먹자”는 말투로

번역 청탁하지 말아 줬으면.

그 배신자의 철퇴는 언제, 누구의 뚝배기를 깨뜨릴지 모른다.







사실은,

나는 아직 오역의 담을 넘을 만큼의 담이 없다.

글자와 의미 사이 그 아찔한 수갱 속에서

오늘도 미끄러지며 헤맨다.


정확함보다 어긋남을 더 사랑하는 법을

고작 하루만큼 더 배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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