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8km와 11.2km 사이
“팀장님…저 면담 좀 하고 싶은데요..”
잘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 어색하게 건네는 이 말은 십중팔구 ‘탈출 의사 표시’이다. 보통은 사이가 좋다면 고민 상담이든, 망쳐버린 업무의 고백이든, ‘면담’이란 말을 꺼내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가볍게는 본인의 업무에서 탈출하고자 업무 변경을 요청하거나, 보다 심각하게는 현재의 조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최악은 회사를 탈출하는 퇴사 통보로까지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처럼 회사를 잘 다니는 사람의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퇴사를 결심한 사람은 각각 나름의 이유를 안고 있는 듯하다.
대인 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과도한 업무로 인한 번아웃, 혹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더 나은 경제적 혜택을 찾아 부푼 희망을 안고 신대륙으로 떠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이 모든 문제들은 퇴사자뿐 아니라 장기 근속자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탈출욕구이자 두려움이다. 단 그 정도가 임계점을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면담’ 신청으로 이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르는 포인트가 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는 역작을 통해 운동의 세 가지 기본 법칙(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집대성해 고전역학을 완성한 뉴턴은, 달이 지구를 돌고 있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뉴턴의 대포’라는 사고 실험을 고안한다.
지표면에서 대포를 발사하면 발사 속력에 따라 일정 거리를 날아가던 대포알은 다시 지표면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점점 빠른 속력으로 대포를 쏘다가 속력이 초속 8km에 다다르면 대포알이 지구로 다시 떨어지지 않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려는 힘과, 지구와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며 지구 주위를 영원히 돌게 된다. 달이 지구를 도는 원리가 바로 이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인공위성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지수가 초속 8km 수준 이하라면 아직은 ‘면담’이 필요 없는 안정적인 상태이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한층 더해 초속 11.2km 수준에 도달한 때이다.
초속 11.2km는 소위 ‘지구탈출속도’(엄밀히 따지면 속도는 방향을 포함하는 벡터값이라, 방향과 무관한 지구탈출‘속력’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한다.)로 알려져 있다. 초속 11.2km가 된 대포알은 더 이상 지구의 중력에 얽매이지 않고, 지구를 탈출해 무한한 우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와 회사 사이의 만유인력을 넘어서는 스트레스에 다다른 직장인은 뉴턴의 대포알처럼 ‘출애굽기’.. 아니 ‘출회사기’를 쓰며 동료들의 엑소더스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지구탈출속도는 대포가 발사되고 추가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았을 때, 즉 처음 발사되는 힘 만으로 지구를 탈출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수치이다. 현재 인류의 기술로 지표면에서 초속 11.2km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실제의 우주 로켓은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의 교훈처럼 훨씬 느린 속도지만 지속적으로 연료를 불태워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것으로 지구를 탈출하는 것이다.
회사 탈출자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번의 급발진으로 초속 11.2km에 도달하기보다는 시나브로 쌓여가던 스트레스가 회사의 중력을 넘어서는 순간 결심의 칼날을 빼들게 되는 것이다.
발달된 레이더를 지닌 상사라면 고고도로 부유하는 직원을 조기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의 탈출을 막으려면 비행고도를 내릴 강력한 중력과 같은 메리트를 제공해야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스트레스 지수는 초속 8km와 11.2km 중 어느 지점에 와 있나..
회사를 빙글빙글 도는 장기근속 인공위성이 될 것인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