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
퇴근 후 현관 앞에 놓인 묵직한 택배 상자를 마주했다. 엊그제 아빠가 보내셨다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반가움이나 고마움보다 먼저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결국 비행기로 보내셨네."
배편으로 보내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통화할 때마다 알겠노라 대답하시던 아빠는 애초에 비행기에 실어 보낼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채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택배 왔어요. 결국 비행기로 보내셨나 봐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는 네가 읽을 책도 많고 당장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한 달을 기다리게 하냐며 비행기로 보낸 거야. 벌써 도착했구나. 이번엔 빨리 갔네!"
한국에서 배로 보내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평균 한 달 반 이상이 걸린다. 물건이 분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덤이다. 반면 비행기는 늦어도 일주일이면 도착한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아빠가 당연히 배편을 이용하실 줄 알고, 운송비 걱정 없이 필요한 것들을 잔뜩 주문했었다. 동생이 대신 주문해 준 수십 권의 책까지 합쳐지니 박스는 이미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비행기로 보낼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책 몇 권만 부탁했을 것이다. 물건값보다 훨씬 비싸게 나왔을 운송비를 생각하니, 아빠의 그 고집스러운 사랑이 못내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통해 내 투덜거림을 전해 들으셨는지, 짧은 메시지 한 줄을 보내오셨다.
"수진아, 아빠가 네가 필요한 건 다 보내줄게. 언제 또 이렇게 해줄 수 있겠니. 아빠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인 내 마음과 어쩌면 이리도 다른 걸까. 그 바다 같은 넓이를 감히 헤아릴 길이 없다. 한국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우유와 소보로, 모든 빵들을 한가득 사다 두시며 한국에 있는 동안이라도 실컷 먹으라던 아빠였다. 캐나다로 돌아오는 날이면 공항에서 나를 안고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시던 분. 그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도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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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글을 잘 쓰시는 분이다. 언젠가 아빠가 직접 쓴 글들을 모아 만든 A4 사이즈의 책 한 권을 건네주신 적이 있다. 아빠가 가장 힘들었을 때와 행복했을 때, 주말마다 산행하며 꾹꾹 눌러쓴 일기 같은 기록들이었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아빠가 견뎌온 삶의 무게와 절망, 고독, 그리고 어쩌면 낙담하며 써 내려갔을 문장들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투박한 종이 뭉치를 건네며 아빠는 말씀하셨다.
"아빠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에게 들려주고 싶구나. 나중에 찬찬히 꺼내 읽어보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와 나는 여전히 그 기록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늘 카메라를 들고 계셨다. 사진에 유독 관심이 많으셨던 아빠 덕분에, 지금도 본가에 가면 어린 날의 나를 마주하며 그때의 장면들을 선명하게 떠올리곤 한다. 아빠는 캐나다로 택배를 보내실 때마다 잊지 않고 편지를 넣으신다. 매번 내용은 다르지만 첫 문장은 늘 한결같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딸 수진에게.’ 화선지에 먹물이 확 번져나가듯, 그 문장을 읽을 때면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아빠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 같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역경을 이겨내는 나무. 반면 엄마는 그 나무 곁에서 반짝이는 여린 나뭇잎 같다. 혹독한 겨울을 나무와 함께 견뎌내고, 봄이 오면 연둣빛으로 피어나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잎사귀. 햇살을 듬뿍 머금어 자식들이라는 각각의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엄마는 내게 사계절의 나뭇잎과도 같은 존재다.
나는 아빠의 끈기를 닮았다. 그것은 단순히 참고 견디는 고통이 아니다. 매주 산행을 하며 자신만의 고독과 마주하고 그것을 한 장 한 장의 글로 기록해 내던 인내. 절망하던 순간들을 툭툭 털어내고 뒤롤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던 인내. 아빠의 인내는 곧 나를 향한 커다란 등받이였다.
나는 엄마의 감성을 닮았다. 그것은 주변의 작은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자식들이 가진 각기 다른 빛깔을 더 선명하게 돋보이게 만드는 섬세함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처럼, 엄마는 자식들의 마음이 추울 때는 온기를 채우고 기쁠 때는 함께 반짝여주었다.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편지를 써주시는 두 분의 성정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생일을 챙기고, 진심으로 축하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내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습관이 되었다. 이 모든 다정함은 결국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뿌리와 따스한 잎사귀에서 배운 가장 값진 유산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아마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리움이 몇 배로 느껴지나 보다. 아빠도 분명 나의 물건을 박스에 담을 때, 나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보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 그리고 엄마.
- 세상에서 하나뿐이 딸 수진.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