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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취미생활

내가 주는 작고 따뜻한 선물 – 캘리그래피 이야기

by Soo 수진

처음 캐나다에서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때, 이곳의 결혼식이 한국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건 신부의 친한 친구들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들러리를 선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신부와 신랑의 어머님들이 한복 대신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꽤 예쁘고, 특별했다.

한국에서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을 법한 드레스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다가왔던 건, 아마도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고,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메뉴와 식순이 적힌 리플릿 위에 문득, 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손글씨처럼 흘러가는 예쁜 서체였다.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이렇게 누군가의 특별한 날에 손글씨로 마음을 전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 글씨체가 자꾸 마음에 남아, 어떤 서체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그 서체의 이름, 카퍼플레이트(Copperplate). 카퍼플레이트는 캘리그래피 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은 사랑을 받는 서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는 데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서체이기도 했다.

나는 늘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 일은 일단, 도전해 보는 편이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도구와 종이가 필요한지 찾아보다가 결국,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해 수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 서체를 배울 때, 연습 또 연습

그런데, 왠지 원데이 클래스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쓰는 글씨가 이 서체의 기본을 지키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이 서체를 제대로 배워와야겠다고.

마침 친분이 있는 디자인 회사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하고 싶은 걸 조심스레 전했더니, 그분이 책 한 권을 건네주시며, “이 책을 쓰신 분이 바로 그 서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야. 내가 연결해 줄게.”


12주 과정의 카퍼플레이트(Copperplate) 서체 수업이었다 하지만 늘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나는

정규 클래스에 참석할 수 없었고,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12주 수업을 1:1 개인 레슨으로 5회에 걸쳐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하나씩 배워 나갔다.

수업에 필요한 도구는 다음과 같았다:

뾰족한 펜촉: 유연성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나는 초보자에게 적합한 Zebra G 펜촉을 사용했다.

펜대: 펜촉을 끼워 쓰는 전용 홀더.

잉크: 색감이 은은하고 깊이 있는 호두 잉크(Walnut Ink).

연습용 종이: 펜촉이 걸리지 않고 잉크가 번지지 않는, 매끄러운 질감의 종이.


가운데가 첫 글씨, 그리고 함께 시도한 말린 꽃과 나뭇잎 :)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펜촉을 시도해 보며 내 손에 잘 맞는 도구를 찾아갔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전문적인 가르침을 따라 꾸준히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처음 배우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정말 매일 앉아서 글씨만 썼던 것 같다.

카퍼플레이트 서체를 알기 전에는 어떤 글씨가 잘 쓰인 글씨인지도 몰랐는데, 전문가에게 배운 뒤부터는 눈이 트였다. 이제는 어떤 글씨가 잘 쓰인 글씨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전문가들의 글씨를 찾아보고, 매일매일 글씨 연습했었다. 너무 잘 쓰고 싶어서. 이 글씨가, 너무 예뻐서...

그러던 어느 날,
글씨와 함께 나만의 특별한 브랜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건, 산책할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들꽃과 나뭇잎, 그리고 캐나다의 가을 낙엽들이었다. 나는 책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두었던 건조된 꽃과 잎사귀들을 꺼내

글씨와 함께 액자와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너무 예뻤다.

건조된 자연물과 손글씨가 어우러진 내 첫 작품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손글씨는 아직 미숙했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담고 싶었던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글씨를 쓸 때 늘, 선물할 사람을 생각한다. 조용한 음악을 틀고, 그 사람을 떠올리며 천천히 써 내려간다. 몇 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펜을 잡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거나 잉크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번지기 쉬워져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때도 많다. 그래서 더 정성을 다하게 된다. 한 글자 한 글자, 기쁘게 받아줄 모습을 상상하면서.

글씨를 쓸 때면 머릿속이 맑아진다. 잡다한 생각이 사라지고 기분 좋은 고요함이 마음에 스며든다.


누군가의 생일,
크리스마스,
집들이,
기념일,
연인의 생일,
그리고… 그저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날.

나의 이 작은 취미는, 나에게도 즐거움이지만 무엇보다 내 기쁨이 그들에게도 전해지는 일이라는 걸 느낀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이 카드 정말 네가 쓴 거야? 프린트인 줄 알았어!”
“네가 준 카드는 지금도 냉장고에 붙어 있어.
매일 너의 축하를 보고 싶어서.”
“남자친구가 너의 카드 너무 좋아했어! 고마워, 수.”
“우리 집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물이야.”
“특별한 날에 특별한 선물, 정말 고마워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작은 정성에도 누군가는 깊이 기뻐할 수 있다는 걸 마음으로 배운다.

나의 취미생활이 나에게도 즐거움이지만, 나의 기쁨이 전해지는 그들에게도 기쁨이라고 말한다.


나의 행복을 2배로 전해준 사람들의 감사함_누군가의 인스타 그리고 사진들

인스타그램을 통해 DM으로 “배우고 싶다”라고 연락을 해오는 사람도 있었고,
“클래스를 열어보자”며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제안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누군가를 가르칠 만큼의 실력이 부족한 그저 이 글씨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나의 소중한 취미이기에, 그 즐거움이 의무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지금처럼 조용히 깊이 즐기기로 했다.


이 작은 선물이 나와 누군가를 함께 웃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감사함을 전해준다. 내가 그들에게 했듯이.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나의 취미생활은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펜을 드는 그 순간, 나에게 스며든 행복이 내 주변으로

멀리멀리 번져간다.

Soo+

캐나다의 은은한 나뭇잎을 사용한 축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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