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 문화
서울에 살 때는 주변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을뿐더러 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은 또 다른 선택이기 때문에 내가 어릴 때처럼 여러 가족들이 모이고 아이들이 함께 노는 등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나와 아내의 형제만 하더라도 자녀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서 소망이는 직계 사촌이 한 명도 없다. 나는 그게 늘 아쉬웠고, 아이가 또래 아이들을 많이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주에서 산지 4개월 반이 지난 지금, 소망이는 정말 많은 언니, 오빠와 삼촌, 이모들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인데 신기하게도 아직 제주는 둘 이상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되게 많다. 둘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셋, 하나만 가진 가정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하나만 키우는지를 막 설명하기에 처음엔 그게 되게 낯설었다. 서울에서는 하나도 쉽지 않은 시대에 셋, 심지어 넷도 키우는 가정을 보며 같은 나라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다.
물론 우리 교회가 특별한 걸 수도 있다.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행원교회인데 여기는 '다음 세대'를 키우는 데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교회라 아이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문화를 갖고 있다. 사실 몇 년 전에는 전형적인 시골 교회로 어르신 몇 분만 고정적으로 다니는, 활동적이지 않은 교회였다고 한다. 그런데 젊은 목사님이 부임하시면서 지역의 아이들을 위한 노력들을 하나 둘 시작했다고 한다. 행원리는 월정해변을 바로 앞에 둔 마을로 해안도로 유동인구는 꽤나 많은 동네지만 마을 자체 인프라는 여느 시골마을 정도라서 아이들을 위한 문화시설이나 교육시설이 특별히 없다. 그래서 행원교회는 아이들이 아무 때나 편하게 놀러 올 수 있는 장소로서 교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몇 년의 노력 끝에 '들락날락센터'라는 어린이/청소년 문화센터를 건립하여 운영 중이다.
우리 가족이 행원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이 센터 때문이었다. 들락날락센터에 가면 도시의 키즈 카페처럼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 지난여름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소망이를 위한 실내 놀이터를 찾다가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센터의 취지와 건립 배경 등을 알게 되면서 나도 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해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나누고픈 마음에 영어교육 재능기부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행원교회와도 가까워지면서 예배에도 출석하게 되었고 지금은 교인이 되어 다른 분들과 교제도 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를 가진 교회라서 그럴까, 우리 교회엔 아이들이 정말 많다. 키즈카페 못지않은 놀이터가 있으니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는 항상 요란하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비슷한 또래의 엄마 아빠들이 많다. 데리고 오는 것뿐 아니라 나처럼 재능기부를 하거나 운영에 필요한 스태프로 자원봉사를 하는 부모님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분은 매주 목요일에 아이들 간식을 만드는 봉사를 하시고 어떤 분들은 센터 운영이 끝난 저녁시간에
아이들이 휩쓸고 간 놀이터를 청소하신다. 나는 이런 공동체 문화가 참 좋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부모들이 연결되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동체가 되어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게 마치 하나의 마을인 것 같아서 든든한 마음이 든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동화 속 이야기 같았는데 여기서는 정말로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 같이 또래 친구들은 언니, 오빠로 어른들은 이모, 삼촌으로서 함께 한다. (행원리 뿐 아니라 제주 전역에서 출석하는 가정이 많아서 주소상으로는 한 마을이 아니지만 공동체의 의미로는 한 마을이 된다.) 지난 주일에는 전교인 체육대회를 했는데 역시 아이들을 중심으로 모든 세대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23년이 아닌, 내가 자란 90년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겨운 느낌이었다.
나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다들 영어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도시와는 다른지 아직 알파벳이나 기본 회화를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에 살 때는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아빠의 능력이 구별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는데 이 역시도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감사하게도 지역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이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라고 해서 지금껏 즐겁게 수업을 하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도 어려워하면서도 즐겁게 참여해 주어서 조금씩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제 4개월 반 살았으니 아직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고 많은 것들을 도시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시골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많고 도시와 전혀 다른 라이프스타일에 갈등 아닌 갈등도 겪어봤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제주 생활이 만족스러운 건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다. 출산율이 바닥을 쳐서 아이들의 공동체 생활이 갈수록 약화되는 시대에 이런 공동체를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우리 소망이가 많은 또래 친구들과 이모, 삼촌들을 통해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대인 관계에서 자신감이 있는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부모만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마을의 역할을 찾게 되어서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