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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망이 아빠 Oct 22. 2023

"수유실은 여자 화장실 쪽에만 있어요."

전업육아를 시작한 아빠가 겪은 평일 낮의 이야기

아빠육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평일 낮 시간에 소망이의 주 양육자가 된 나는 최대한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시간도 잘 안 가거니와 이전에는 갖기 어려웠던 아이와의 시간이 충분히 생겼으니 새로운 활동들을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마치 '데이트'를 하는 것 같은 설렘도 있었다.


하루는 소망이와 한 국립미술관에 갔다. 좋은 전시도 많고 야외 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아이가 답답해하면 밖에서 뛰어놀 게 할 수도 있고 지치면 유모차에 태워 여유롭게 미술 작품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어른이 먹는 국이나 밥보다는 고구마나 계란 같은 식재료 위주의 이유식 식단을 할 때라 도시락을 까먹기 좋은 환경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오전에 미술관에 도착해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야외에 전시된 커다란 호박 조형물 앞에서 소망이와 사진도 찍고 견학 온 학생들 무리에서 '아, 내가 진짜 육아를 시작했구나.' 하는 실감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소망이와 미술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킁, 킁" 익숙한 냄새가 나서 나는 급하게 수유실을 찾았다. 지금이야 실내외 어디서든 아이 기저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지만 막 아빠육아를 시작한 내게 아이와 단둘이 하는 외출에서 맞이한 응아 타임은 아직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수유실은 여자 화장실 쪽에만 있어요."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장소가 있냐고 물은 내 질문에 안내 직원분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셨는데 그쪽으로 가보니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이 서로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수유실은 여자 화장실로 이어진 입구로 쭉 들어가면 화장실 바로 옆에 같이 있어서 사실상 여자들만 출입이 가능해 보이는 구조였다.


일단 남자화장실에 가보니 기저귀 갈이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은 서서 갈 수 있는 기저귀도 애용해서 화장실 세면대나 바닥에 아이를 세워두고 기저귀를 갈 수 있지만 당시엔 갖 아빠육아를 시작한 때라 눕혀서 가는 것만 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수유실이 있는 여자화장실 입구 쪽을 서성였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성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민망하면서도 혹시 수유실에서 나오는 다른 아빠는 없는가 싶어 살펴보았다. 


유모차를 잡고 선 아빠가 여자화장실 앞을 서성이니 몇몇 아이 엄마들이 눈치를 채고는 말을 걸어왔다. "애기 기저귀 갈아야 돼요?" 나는 반가워서 "네, 그런데 여자화장실이랑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들어가도 될까요?" 감사하게도 그 엄마들은 앞장서서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쭉 들어가 보니 왼쪽에는 화장실 입구, 오른쪽에는 수유실이 있는 구조였다. 시설은 잘 되어 있어서 무사히 기저귀를 갈고 얼른 통로를 빠져나왔다. 여자화장실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괜히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수유실. 단어의 의미만 놓고 보면 수유를 하는 곳이니 여성들만의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수유를 하는 공간은 수유실에서도 안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고 열린 공간은 주로 기저귀를 갈고 뒤처리를 하는 용도다. 그러니까 Baby room의 개념으로 아빠와 엄마 모두 출입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꽤 많은 곳에서 수유실은 엄마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모습이다. 간혹 수유실이 없어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설치된 곳들도 있는데 여자화장실에만 있어서 아내가 소망이의 기저귀를 갈았던 때도 여러 번 있었다.


딱히 불평을 하는 건 아니다. 우리 부부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는 '수유실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통용되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술관에는 열에 아홉은 엄마들이었다. 그러니까 열에 아홉은 어차피 엄마가 기저귀를 갈 테니 수유실은 여자화장실과 입구를 같이 하는 게 더 편리한 걸 수도 있다. 


이 날, 나는 '아빠육아'의 삶이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평일 낮의 스케줄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음 한편에는 소속이 없는 사람이 갖게 되는 일종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리했다. 그런데 그 결정을 한 이유가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거나 시험을 준비하는 등의 도전이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게 과연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국립미술관조차 아빠를 위한 Baby room이 없는데 내가 내린 이 일반적이지 않은 결정이 앞으로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날 이후 아이가 선 채로 갈 수 있는 기저귀를 항상 챙겨 다닌다. 굳이 수유실을 찾지 않고 남자 화장실에서도 척척 기저귀를 갈고 날이 좋을 때는 유모차에 아이를 세워두고 갈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육아'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삶의 형태에 대한 걱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빠육아'를 선택한 대가로 어쩌면 어느 정도의 돈과 사회적 명예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우리 가족, 특히 아이에게 미치는 어마어마한 긍적적 영향을 믿는다. 물론 그 시간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고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칠 때도 있지만 아이가 엄마, 아빠의 품에서 강한 유대와 사랑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데 대한 사회적인 불편함보다는 자부심을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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