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흔적
아름다운 세상이 저 너머 어디에 꼭 있을 거야. 꼭 변치 않는 사랑을 공유할 사람이 있을 거야. 그게 나의 애정관이었다.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꿈꾸는 사람. 드디어 그럴 사람을 만났다. 아니 만났었다. 완성되지 않은 퍼즐의 풀리지 않을 조각 같은 아귀가 꼭 맞는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서 흘러 넘치는 충만한 따뜻함과 애정 어린 손길과 친절은 마치 나만을 위해 신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내 깊은 곳에 있는 저울을 꺼냈다.
내 삶의 균형이 깨질까 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렇게 사랑에 함구하던 중 사랑이 시작된 건 아주 찰나였다. 그에게서 같이 일구어 나갈 세상이 그의 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손잡고 나갈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기까지 나는 뒤로 물러나 그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탐색했다.
같이 나의 과거를 공유하고 상처를 꺼내 약을 발라주다가 나는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했고 첫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사랑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한 조각의 쓸쓸함을 남기고 싶었다. 그가 더욱더 내면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 자락이 있었다. 나는 이것 또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한 배려의 범주라고 생각했다.
사랑. 그 두 글자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얼마나 지울 수 있는지. 얼마나 더 소유해야 완전히 당신을 가질 수 있을지.
그의 체온은 따뜻했고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따스함 속에서조차 언젠가 겨울이 올까 봐 늘 마음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나를 품었고 나는 그 품 안에서조차 혼자였다. 그토록 바라던 사랑이었지만 나는 그 사랑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계절은 흘렀고 눈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가 먼저였는지 내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지막 눈빛이 내 첫 고백만큼 뜨거웠다는 사실만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를 떠올리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문득문득 떠오르지만 그리움을 꺼내 들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런 날이 많아졌고 그런 내가 낯설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은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니고 끝난 사랑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서 흐른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들이 있고 표현하지 않아도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오래전 다녀간 사람이 남긴 향기가 방 안에 오래 머물듯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조용해진다.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들이 그리워서라기보다는 그때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조심스럽고 용기 있던 나. 누군가를 온전히 믿으려 애쓰던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나는 그 시간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이름을 불러보지 않아도 된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와 함께한 날들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단단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짧은 계절이었지만 계절은 늘 지나간 후에야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사랑했고 지금도 그 계절을 담담히 떠올린다. 다만 이제는 아프지 않다. 그냥 조금 조용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