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에 대하여
제철 나는 재료를 먹어야 하는 이유
– 계절을 따라 사는 밥상의 지혜
할아버지는 장을 보러 가실 때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시곤 하셨다.
“날이 이렇게 풀렸으니,
이제 냉이쯤 나왔겠구먼.”
그러고는 조용히 시장으로 향하셨다.
시장에서 돌아오실 땐
장바구니 안에 꼭 계절 하나가 담겨 있었다.
그건 누구나 살 수 있는 채소가 아니라,
햇살과 바람과 시간 속에서
오직 그 계절에만 피어나는
생명의 조각들이었다.
봄이면 쑥과 냉이를 데쳐
된장에 무치셨고,
그 위에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이건 입 안에서 봄이 나는 거지”
하고 웃으셨다.
여름이면 물오른 오이를
통통하게 썰어 고추장에 찍어 드셨다.
오이 속의 시원함이
더위 먹은 몸속을 쓸고 지나간다며,
그 한 조각을 씹는 얼굴엔
한낮의 더위도 잠시 물러나곤 했다.
가을엔 가지와 버섯, 무화과와 밤을
노끈으로 엮어 천천히 말리셨고,
겨울엔 굵은 무를 썰어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와 시래기를 꺼내어
장독 위 햇볕에 내놓으셨다.
그 모든 준비가 마치 의식 같았고,
나는 그 곁에서 사계절을 배우며 자랐다.
그땐 몰랐다.
그렇게 계절을 따라
밥상을 차리는 일이
얼마나 현명하고,
또 얼마나 깊은 삶의 방식인지.
지금은 안다.
제철 나는 재료를 먹는다는 건
자연과 함께 숨 쉬는 일이다.
우리 몸은 계절을 잊지만,
자연은 결코 잊지 않는다.
매 순간,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자연은 알고 있다.
봄에는 겨우내 쌓인 독소를 씻어내는
연한 나물들을 내주고,
여름엔 수분이 많은 채소로
더위를 견딜 수 있게 한다.
가을엔 영양 많은 열매와 뿌리채소를,
겨울엔 면역과 기력을 북돋아줄
무, 굴, 묵은지 같은 것들을 건네준다.
우리는 그저,
잘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꼭꼭 씹으며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제철 음식은 그냥 먹는 게 아니야.
그건 자연이 지금 너한테 해주는 이야기야.
‘이제 좀 씻어내라’,
‘좀 식어라’,
‘단단해져라’
그런 말이 담긴 거지.”
나는 그 말씀을 오래 씹는다.
그리고 오늘도 장에 가면
먼저 계절의 얼굴을 살핀다.
시장 입구에 내걸린 봄나물 바구니를 지나며,
흙이 묻은 감자와 눈꽃이 남은 무를 만지며,
나는 묻는다.
지금 나오는 게 무엇인지,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를.
그리고 그 이야기로 하루를 조리한다.
찬장을 열고,
물을 붓고,
칼끝에 시간을 얹어
그 계절의 맛을 천천히 되살려낸다.
제철 재료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다.
그건 시간의 결,
자연의 몸짓,
우리를 살리는 흙의 리듬이다.
그러니 계절을 먹는 일은,
자연을 듣는 일이다.
입으로 먹고,
몸으로 기억하고,
마음으로 배우는
살아 있는 교과서 같은 것.
몸이 아플 때 약을 찾기 전에,
마음이 허할 때 위로를 구하기 전에,
우리는 밥상 위에 먼저 계절을 차려야 한다.
그 계절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