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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장맛에 대하여

양념의 기본

by 마르치아


“이거 봐, 경화야. 이건 고추장이야.”

할아버지가 반찬 사이에 놓인 빨간 종지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매워 보이지? 근데 매운 맛만 있는 게 아니야.

엿기름도 들어가고 찹쌀도 들어가서 달큰하지.

살다 보면 말이지, 매운 일에도 단맛이 숨어 있는 법이야.

고추장은 그런 거야. 혼자 매운 척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려.”


나는 조그만 종지를 들여다보았다.

빨간 빛 속에서 반짝이는 윤기.

무언가를 꼭꼭 감춘 표정 같았다.


“그 옆에 있는 건 간장이야.”

할아버지는 이번엔 까만 물처럼 보이는 그릇을 가리켰다.

“제일 오래된 맛이지.

조용하지? 근데 이게 음식 맛을 딱 잡아주는 거야.

사람도 그래. 말 많이 하는 사람보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귀한 거야.

간장은 그런 사람이야. 말없고 진중한 사람.”


나는 간장 앞에 조용히 숟가락을 댔다.

검고 잔잔한 그 물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할아버지가 말한 ‘말없이 곁을 지키는 사람’이 간장이라면

그건 마치, 바로 할아버지 같았다.


잠시 말을 멈춘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된장 쪽을 바라보았다.

“이게 된장이야. 된장은 말이지, 그 집안의 맛이야.

집집마다 된장 맛이 다 다른 이유가 있어.

그 집 사는 내력이 그대로 담기거든.

그래서 된장은 흉내내도 절대 똑같아질 수 없어.

이건 우리 집만의 시간이 담긴 맛이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숟가락으로 된장을 조심스레 떠봤다.

냄새가 구수했다.

짠내도 났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냄새였다.

마치 오래 묵힌 담요에서 나는 햇볕 냄새 같았다.


“나중에 네가 밥상 차릴 때가 오면,

이 세 가지는 꼭 기억해.

고추장은 눈에 띄는 사람이야.

간장은 말없이 돕는 사람.

된장은 오래 함께한 사람.

그리고 말이야,

이 셋이 모여야 비로소 밥상이 살아나.”


그날 밥상 위엔

고추장도 간장도 된장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이 배인 건,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음식의 맛보다 먼저

음식이 놓인 자리에 깃든 마음부터 살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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