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의 비밀
밥 숟가락 놓는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밥 숟가락 놓았다.”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숟가락이 왜? 밥 다 먹었나? 그냥 설거지통에 놓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말의 진짜 뜻을 알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는 건, 이 세상을 다 살고 조용히 작별한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아주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도 숟가락을 아무 데나 놓지 않으셨다.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심고 계셨다. 나는 맨발로 뛰어나가 물었다.
“할아버지, 뭐 심어요?” 할아버지는 허리를 펴며 씨앗을 가리켰다. “백일홍 씨앗이지.”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손엔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반짝이는, 할아버지가 밥 드실 때마다 쓰던 은수저.
“할아버지, 밥숟가락으로 땅 파요?” 내가 묻자, 할아버지는 수저를 손바닥에 올려 햇빛에 비추며 웃으셨다. “그래. 밥 먹던 수저로 씨앗을 심으면 꽃이 외롭지 않거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밥숟가락이랑 씨앗이랑... 친구예요?”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밥은 사람을 살게 하고, 씨앗은 꽃을 피우게 하지. 둘 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거야.”
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지만, 뭔가 따뜻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할아버지, 나도 숟가락으로 꽃 심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씨앗을 한 알 손에 올려주시며 말했다. “그럼 경화가 오늘 한 송이 심어보자.” 나는 조심조심 숟가락으로 땅을 파고 씨앗을 넣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처럼 흙을 덮고, 물을 한 모금 주었다. 그날 심은 백일홍은 며칠 뒤 작은 초록 손을 내밀었고, 몇 주가 지나자 분홍빛 얼굴을 활짝 피웠다. 나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꽃씨야. 밥 먹었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날,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숟가락 놓으셨대.”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박힐 줄은 몰랐다. 어릴 땐 그저 식사를 마치고 내려놓는 도구라 여겼던 숟가락이, 이제는 한 사람의 생을 닫는 조용한 문이 되어 있었다. 지금 내 서랍엔 할아버지의 은수저가 하나 들어 있다. 나는 가끔 그 수저로 화분의 흙을 고르고, 마른 잎을 걷어낸다. 마치 할아버지 손처럼 작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그 위에 백일홍 씨앗을 하나 올려놓으며 속삭인다. “잘 자라. 너 외롭지 않게, 밥숟가락으로 심어줄게.”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삶을 퍼서 건네는 사람이었다. 밥을 퍼던 손으로 꽃을 심고, 꽃을 피우고, 세상과 작별할 때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는 분이었다. 나는 그 손끝의 의미를 이제야 안다. 할아버지는 그러셨다. “경화야, 밥은 나눌수록 복이 되는 거란다.” 그 말은 씨앗에도, 사람에게도, 지금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제 그 뜻을, 한 송이 백일홍보다도 더 오래도록 가슴에 피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