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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밥상에도 동서남북이 있어

다 자리가 따로 있단다

by 마르치아




오늘도 혼자 밥상을 차린다.

무심코 국을 가운데 놓고

나물과 볶음 반찬을 꺼내는데

손이 자연스레 방향을 기억한다.

동쪽엔 나물,

남쪽엔 볶음,

서쪽엔 멸치,

북쪽엔 물김치.

할아버지가 계시던 그 자리.


그때의 말이

오늘따라 자꾸 떠오른다.


“경화야,

밥상은 그냥 차리는 게 아니란다.

방향이 있어야 해.

사람이 어디에 앉느냐,

무엇을 먹느냐,

그게 다 기운을 따라야 하는 거지.”


“네가 앉는 동쪽엔

푸른 나물이 잘 어울린다.

목(木)의 기운이 흐르거든.

미나리, 시금치, 숙주 같은 게

너한텐 좋지.

어린 사람은 푸른 걸 먹고 자라야 한다.”


“남쪽은 화(火)의 자리다.

불을 다루는 자리니까

감자볶음이나 버섯볶음 같은

볶은 반찬이 어울리지.

엄마가 앉는 자리였지.”


“서쪽엔 금(金)의 기운이 흐른다.

마른 멸치나 생선,

말라서 단단한 것들.

그 자리는 아무도 안 앉아도 괜찮아.

자리는 사람보다 먼저 있어야 하거든.”


“북쪽은 수(水)의 기운.

말이 적은 자리,

생각이 고요한 자리.

그래서 나는 거기 앉았단다.

물김치 같은 걸 먹으면

속이 잠잠해져.”


“가운데엔 흙에서 난 걸로 끓인 찌개를 두는 거야.

감자, 무, 마늘, 호박, 된장…

그게 토(土)의 기운.

이 상의 중심이지.

사람들이 서로 덜어 먹는 찌개는

중심을 공유하는 일이거든.”


“경화야,

밥상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건

반찬 이름이 아니라

자기 자리지.

그리고 그 자리에 맞는 걸

고요히 먹는 거야.”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그 말들이

그저 어른들의 습관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혼자 상을 차리며

무심코 방향을 지킬 때마다

나는 알게 된다.


그 말들은

기억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질서였다는 걸.


나는 아직도

그 자리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젠 할아버지 없이도

상 하나를 반듯하게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말은 없지만

이 모든 것이

그분이 남긴 유산이다.


오늘도 나는

가운데 찌개를 올리고

그분의 자리에

물김치 한 종지

조용히 놓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한다.

“할아버지,

이제 저도

밥상을 제 자리에 놓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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