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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속상할 땐 누릉지를 먹어봐

by 마르치아



그날 이후, 속상한 날엔 나도 누룽지를 끓인다. 시간은 참 많이 흘렀고, 할아버지는 오래전 하늘로 떠나셨지만 누룽지는 여전히 내 삶에 남아 있다. 밥을 짓고, 모든 이가 떠난 후, 밥솥 바닥에 눌어붙은 자리에 물을 붓고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 그건 단순히 누룽지를 끓이는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바닥까지 불려내는 의식 같은 순간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풀어지는 밥풀을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숨어 있던 감정들이 고요하게 떠오른다. 아무 일 없는 듯 웃던 날들, 다 괜찮다고 되뇌던 밤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을 알아주던 그날의 할아버지가 조용히 따라오듯 떠오른다.





누룽지는 자작하게 끓는다. 작고 조심스러운 기포들이 피어오를 때, 나는 젓가락을 들지 않는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서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누룽지도 스스로 풀리기를 기다린다.






숟가락을 들기 전, 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꺼내 듣는다.



“속상할 땐 누룽지를 먹어야 한단다. 속이 뜨거운 채로 남으면, 그건 언젠가 딱딱하게 굳어. 굳은 속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지. 그러니 이렇게 불려서, 데우고, 너그럽게 삼켜야 해.”




나는 그 말처럼, 지금도 내 속상함을 혼자 불려 먹는다. 눈물처럼 맑은 물에, 오래 눌어붙은 마음을 풀어내며 숟가락으로 조금씩, 천천히 떠먹는다. 그것은 누룽지가 아니라, 어릴 적 받았던 사랑의 표정이고, 지금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 내 앞에 앉아 조용히 말한다. “속상해.”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긴 시간을 나는 안다. 그래서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밥솥 바닥을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속상할 땐 말이야, 누룽지를 먹어야 해. 이건 마음의 밑바닥에서 우러난 맛이거든. 그 자리를 태우지 않고 남겨둔 사람만이, 끝까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 말은 어느새 내 말이 되었고, 그 국물은 내 마음의 향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누룽지를 끓인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건네지만, 속마음을 알아주는 따뜻한 국 한 그릇. 그것이면 된다. 정말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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