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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는 책책책 Nov 24. 2024

엄마의 자리를 묻다(2)

엄마됨에 생각해보기


“일하는 엄마에게나 전업주부인 엄마에게나 아이는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성과물이다. 아이를 성과물로 보고 싶어 하든 하지 않든 엄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 사회는 아이를 성과물로 본다. 아이의 건강도, 행복도, 성적도 들어가는 대학의 명칭도 모두 엄마의 성과물인 것이다. 그런 시선이 형성되는 데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도 사교육 업체가 일등 공신일 테고, 그 다음이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기반한 전문 기관들이리라.”

-<엄마의 독서> 중에서-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부모는 그 어느 때보다 뼛속 깊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강요받고 있다.


나 스스로도 항상 자문한다. 나는 어떤 엄마인가? 나는 좋은 부모일까? 우리 아이들은 행복할까? 나는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로 비칠까? 나는 아이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 있을까?


그리고 결론은 항상 나는 부족한 엄마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엄청난 사랑을 주고, 아이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해주고, 아이가 원하는 사교육은 무엇이든 다 시켜줄 수 있으며, 내가 어떤 기분이던간에 항상 웃는 얼굴로 아이를 대하고, 아무리 바빠도 삼시 세끼 영양가 높은 반찬들로 밥상을 차려내는 등 내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바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온 엄마들 글을 보면 완벽한 엄마들이 많다. 육아도 잘하고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키고 생활도 잘하는 뛰어난 엄마들이 넘친다. 그러다 문득 내 아이를 보면 무능한 엄마에 불쌍한 아이다. 그러니 불안하고 안달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 없듯이 완벽한 엄마가 있을 리 없다. 있다면 아이에게는 불행이다. 완벽한 엄마 밑에 있는 아이는 늘 부족한 아이일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리원에서 만난 대장 언니!


첫째 아이를 낳은 산부인과에서는 바로 조리원 모임이 만들어졌다. 대장 역할을 하는 언니가 있었는데 나이도 제일 많았고, 성격도 적극적이었고 친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눈에는 독선적인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조리원 동기 10여 명의 아이들을 모아서 단체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배경은 이글루가 있는 포토존이었고 아이들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대장 언니가 갑자기 자기 아이를 이글루 위에 올리는 것이다.


배경에는 그 아이만 이글루 위로 올라가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바닥에 앉아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했다.


“쳇, 자신의 아들이 무슨 왕이라는 것처럼 이게 뭐야?”



사실 나만 불편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무척 불쾌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센터 자리에 자신의 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올려놓았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어떤 엄마도 대꾸할 수 없었던 그 분위기..



그날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조리원 모임 단톡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언니를 내 아이의 친구 엄마로 만났다. 대략 9년 만인가?




그 대장 언니가 내 아들을 알아보았고, 아이에게 연락처를 물어서 내게 전화를 준 것이다.


내 아들을 알아봐 준 것도, 연락을 해준 것도 참 고마웠다.


반갑게 통화를 마치고 그 언니는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만남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했고 그렇게 만남은 흐지부지되었다.


나는 그 대장 언니를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아이 친구 엄마에 대한 나만의 철학이 생겨버렸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언니의 적극적인 성격인 탓에 다양한 추억거리도 많이 만들었고, 모임도 종종 가졌던 거 같다. 또 그 사진관도 본인이 전화해 날짜를 맞추고, 인원 파악을 하고, 예약을 하는 등 귀찮은 일들을 해야 했는데 나는 당시에는 그건 생각하지 못했던 거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보다 백 배 천 배 모임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공헌을 한 건 사실이다.



나만의 아이 친구 엄마에 대한 철학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육아 경력 11년 차지만 아직까지도 엄마들과의 관계가 서툴고 어렵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아이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안달이었고, 친해지고 싶은 이유가 분명했었다.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처를 주고받게 되면서 어느새  ‘적당히’'라는 마음이 자리 잡힌 거 같다.


분명한 건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니 서운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어졌다.


“마흔을 바라보던 그때까지, 내 안에서 사람들은 전부 ‘모 아니면 도’였다. 그동안 친분이 많이 쌓인 사람이라도 한 부분에서 차이를 발견하면 거리를 두었다. 나에게 말실수를 하거나, 정치적으로 나와 다른 입장이라는 걸 알게 되거나, 내가 해준 것에 비해 서운하게 답해오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았어도 다른 관계에서 결례를 저질렀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사람을 바로 ‘내 사람’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저 사람은 ‘아닌 사람’이니 더 이상 성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음 만남부터는 철저히 형식적으로 대했다."

-<엄마의 독서> 중에서-


이 구절을 읽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입원 이후 동료 엄마들의 진실한 관심과 도움으로 타인이 보는 시선에 관용이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타인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고, 우리네 인생에 똑같은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 법이라, 사람은 누구나 계속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음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많은 실수를 했을 것이며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관계 리스트에서 삭제해버렸다면 나는 얼마나 외롭게 살았겠는가라는 저자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나도 엄마로서 많은 실수를 했지...


그들도 나를 관계 리스트에서 삭제했을까?


그리고 내 실수가 있었음에도 나를 관계 리스트에도 삭제하지 않고 나를 이해해 주었던 내 아이 친구 엄마이기도 한 동네 언니가 생각았다.


아이들 문제로 그 언니에게도, 상대 아이에게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아이만 보였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왜 현명한 어른이지 못할까?


인간 관계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자녀 교육서, 육아서도 많이 읽었지만 나도 이 저자처럼 직접 겪은 다음에야 인생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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