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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는 책책책 Nov 23. 2024

엄마의 자리를 묻다(1)

엄마됨에 대해 생각해보기  

아이 둘을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었다.

나는 틈틈이 관련 육아서를 읽었고, 아주 가끔은 강연을 보러 다녔다.


웅진이였나? 엄마와 아이와 애착 형성이 잘 되었는지,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있는지 알기 위해 설문지 작성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이벤트성으로 무료료 진행되었던 거 같다. 아이와 엄마 사이에 애착 형성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각각의 상황에 따라 5개의 문답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아마도 테스트 결과를 이야기 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아이 책을 권유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담당자는 내 결과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제가 뭐라고 말 할 게 없네요. 엄마를 스카우트 하고 싶을 정도네요.”     


아마도 내가 많은 육아서를 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내가 봤던 육아서에는 항상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행동하며, 또 가정에서는 남편과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야 하고, 등등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라고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후가 되자 나는 초등학생이 해야 할, 초등학생이 알아야할 등의 책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나는 이때부터 학습에 대한 강박이 시작되었는데 어릴 때 놀면서 커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쉼 없이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며 학원을 검색하고 있었다.      


어릴 때에는 굳이 사교육 시킬 필요 없다는 책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초등 공부를 어떻게 시켜야 하고 공부 습관을 어떻게 들이는지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면 불안감이 생겼다.      

하지만 결과론 적으로는 나는 육아서를 잘 보지 않게 외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집어 들었던 책들이 되레 내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육아서를 읽어도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고, 때로는 저자의 이야기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엄친아를 키워내는 완벽한 비결이 들어있다는 책들도,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의 이야기도 엄마의 의무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육아의 장면에 빈번히 등장하는 조연이 있다. 이웃에 사는 엄마, 아이 친구 엄마, 아이 엄마가 된 내 원래 친구들. 이름하여 ‘동료 엄마들’이라 하겠다. 동료 엄마들은 내게 동병상련의 위안을 주면서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뒤통수를 쳐서 손이 나가게 만드는 이중적 존재였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아이 엄마’라는 존재는 일단 나와 동등했다. 돈이 겁나게 많든 아니든, 환상적인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이든 아니든, 직업명을 얘기하는 순간 부러움과 질투심을 자아내는 전문직 종사자이든 아니든 상대는 온갖 허르렛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어야 하는 신분의 엄마였다.”
                                                         -<엄마의 독서> 중에서-


생각해보면 아이를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에 보내기까지 참 많은 엄마들을 만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아이 엄마는 아이와는 상관없이 내 친구가 된 엄마였고,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친해졌던 엄마와는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동안 나는 솔직히 아이들의 갈등상황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나는 내 아이가 상대 아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고, 순간 감정이 폭발해 자동으로 상대 아이와 그 엄마에게 반감이 생겼다.


바로 어제까지 ‘언니, 동생’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면서도 내 아이와 갈등 상황이 생기고, 내 아이가 피해를 봤다고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늦은 저녁시간 놀이터에서 엄마들 몇 명은 신나게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또 아이들끼리 놀았다. 재미있게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내게로 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다. 서둘러 집에 들어갔고, 아이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oo가 갑자기 내 배를 주먹으로 때렸어. 태권도를 해서 그런지 주먹이 엄청 아팠어.”     


세상이 노래졌고 분노가 치밀었다. 서둘러 연락처를 물어물어 그 엄마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했다.

    

“아이가 그러는데 그쪽 아이가 제 아이 배를 때렸다고 하더라고요?”   

몇시간 전까지는 언니 동생으로 웃고 떠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쪽 아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 네...죄송해요... 저도 얼마 전에 이 이야기를 듣고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이게 말이 되나요? 갑자기 왜 가만히 있는 아이 배를 때릴 수가 있나요? 우리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원래 그러는 아이가 아닌데 너무 죄송합니다.”   

  

나는 그 당시 그 엄마의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로는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내 아이가 이유 없이 당했다는 분노감에 휩싸여 그날 밤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   

   

'괜히 그 엄마들 모임에 껴서 수다를 떨었나?' 자책으로 시작해

'너는 왜 맞고만 있어! 너도 한 대 때리지 그랬어? 앞으로는 누가 너를 때리면 너도 때려.' 내 아이 탓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분노는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이런 갈등 상황에서 내가 읽었던 육아서는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그날 이유로 나는 그 아이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또한 그 엄마와도, 그 아이와도 그 전 사이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 무리의 엄마들과도 불편해졌고, 멀어졌다.      


하지만 내 아이와 그 아이는 몇년째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같은 반이 된 적은 4학년인 지금까지는 없지만가끔 무리에 껴서 함께 축구를 하는 듯하다.

그런걸 보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나는 그날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아이들은 잊혀졌을까?     

내가 만약에 그날 일을 쿨하게 넘겼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회사 다닐 때에는 말의 힘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이런 내가 아이 일에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눈이 돈다.

   

이제 내 아이는 엄마가 친구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컸다. 내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 엄마들을 나는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4년 정도를 살았지만 마음 터놓고 지낼 친구 하나 만들지 않았다. 물론 커피한잔 가끔 마시는 엄마들은 몇몇 있지만 공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친한 친구이지만 가까이 보면 벽이 느껴지며 대화는 언제나 겉돈다.  

    

이 책을 보고 조금은 그동안 만났던 엄마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게 아니었다. 우리 엄마 군단 모두 외롭게 혼자 분투하고 있었다. 수없이 투하되는 의무와 기대 사이를 누구는 직장을 다니며 전업주부라는 외피를 쓰고, 누구는 대표 엄마라는 직책을 맡으며, 어떻게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위태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균열이 생기면 모두 엄마가 알아서 해야 했다. 무한한 책임이 투하되어 있었지만, 엄마라는 자리에는 책임의 무게에 맞게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권리나 규칙 혹은 상황에 따른 대처법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엄마라는 위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식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직업이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은 많고, 그 일을 해내는 데 공식적인 직책이나 보수는 없으며, 다만 못 해낼 때 엄청난 비난이 따라올 뿐인 무겁고 희한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엄마들은 매 순간 혼자서 결정하고, 결과를 감내하고,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엄마됨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 <엄마의 독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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