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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Oct 22. 2023

엄마의 장례식

2022.10.6

엄마의 장례식은 추석 연휴와 겹쳤다. 추석날 밤 자정을 넘기고 가셨으니 연휴가 끝나는 날 아침이 발인일이다. 3일장을 기준으로 해도 사실상 이틀은 조문객을 대접하고,

발인하는 날은 새벽부터 가족들만의 의식이 진행된다.

추석 연휴 끝자락에 손님이 얼마나 올까. 가족들은 엄마 가시는 길이 너무 조용하면 어쩌나 애가 쓰이지만, 추석이라 어쩔 수 없으니 마음을 비우기로 한다.


오후 1시 즈음 입실을 시작으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상복을 갖추어 입고 손님 맞을 음식들을 주문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장례 패키지에 포함된 음식들이 그대로 제공되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것이 없다. 고맙게도 장례문화가 발달해서 패키지 상품에는 음식을 준비하고 서빙까지 해주는 도우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아빠의 장례식 때, 처음이라 아무런 경험도 없고 경황도 없는 와중에 직접 식당에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문 관리도 신경 쓰면서 접시에 담고 서빙까지 하는 모든 일을 가족들이 해야 했다. 상주는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 가족과 친척 중 여자들이 그 일을 맡았는데, 음식 주문 관리를 맡았던 나는 손님이 오면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식사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10여 년 사이에 얼마나 세련되고 전문적인 시스템이 마련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누군가가 장례 경험을 나누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장례식장에서는 화장실 사용과 숨 쉬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다 돈이라고. 그러니 장례식 가기 전에 집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가라고. 맞는 말이다. 손님 접대에 쓰는 모든 물품은 대부분이 일회용인데, 그것들은 한 번 뜯으면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가격도 조금씩 더 비싸니 어지간한 물건들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손대지 않고 반품하는 것이 장례비를 줄이는 방법이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많아 장례비가 많이 든다. 다행히 오빠와 동생 회사에서 장례 물품과 도우미가 지원되어서  장례 후에는 오히려 남은 일회용품을 처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상복을 갖춰 입고, 속속 도착하는 조화나 장례용품들을 받으며 사인을 해주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이들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일찍 방문한 손님까지 맞이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4시. 입관식을 하기로 한 시각이다.

직계가족과 일찍 도착한 이모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할머니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간다 하니 같이 가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떼어 놓고 고1이 된 큰 조카만 데리고 입관실로 향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낯선 모습을 차마 보여줄 수가 없다.

염습을 하고 온 몸이 단단하게 묶여있는 엄마의 얼굴은 그 밤 새벽과 또 달랐다. 입과 코는 단단히 뭉친 솜으로 모두 막아서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내내 부어있던 얼굴을 생각나게 했다. 작고 예쁘장한 할머니였던 우리 엄마는 왜 이런 모습으로 누워있는 걸까. 이모들의 곡소리를 따라 나도 눈물이 흐른다.


수의 아래에서 가지런히 모은 손의 위치만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몸을 감싸 놓았기에 더 이상 엄마의 손도, 발도 만질 수가 없다. 입관 전 가족들이 망자의 얼굴을 확인하라고 오직 얼굴만 내놓고서는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한다. 차갑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깊은 냉기가 느껴지는 얼굴을 손으로 비비고 얼굴을 갖다 대도 엄마에게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가족들의 인사가 끝나고 나니 모두 한쪽으로 물러서게 한 뒤 마지막으로 얼굴까지 덮고 관 속으로 엄마를 옮긴다. 이제 더이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곳으로 가는 거다.

엄마가 없다. 나는 이제 누구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나. 설움이 몰려온다.


추석 연휴임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 주었다. 오래도록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나는 고민하다가 정말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만 연락했다. 출산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서울 사는 친구만 제외하곤 연락한 친구들은 모두 와 주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어도 달려와주는 이 친구들이 정말 평생 갈 친구임을 확인한 것도 엄마가 남긴 선물이리라.

일흔을 넘나드는 나이에도 장례식 내내 자리를 지켜준 이모들은 장례식장 건물에 마련된 객실에 모셨다. 장례식장에 가족들이 묵을 수 있는 객실을 운영하다니, 경황없는 중에도 발전된 장례 문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발인날 새벽 6시.

사남매 우리 형제는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들까지 있으니 우리 가족만 해도 대식구다. 이모들과 장지까지 자리를 지켜준 사촌 오빠들이 고맙다. 가까운 가족과 친척만 모여 발인제를 지낸 후, 엄마의 관을 앞세우고 가족 모두가 운구 버스로 향한다. 화장장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바라본 출근길 새벽 풍경은 낯설었다.

사람들은 저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데, 우리 가족은 오래도록 일상의 평화로움을 잊고 살았다.


지나고 보니 전시 상황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듯이 지낸 것 같다. 엄마의 컨디션 변화를 지켜보며, 빠른 속도로 나빠지는 엄마를 어떻게 돌보는 것이 나을지 고민하면서 두어 달을 보냈다. 걷기가 힘들어져 휠체어를 알아보던 중 알게 된 장기요양보험제도. 65세 이상 노인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는 그 복지 제도를 위해 우리 가족들은 매달 일정 요율의 보험료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의료 복지를 위한 세금이다.

그러나 신청을 하고서도 한 달이 넘게 심사를 기다렸다. 2급 판정을 받고 전동침대나 욕창방지 매트를 구입하기까지 또 며칠. 실제로 엄마가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요양보호사가 파견되는 것은 요양기관의 구인이 이루어진 뒤가 되었을 테니, 우리 가족처럼 급작스럽게 병이 진행되는 경우는 국가의 보조를 받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힘든 상태로 오래 지속되는 환자나 가족의 경우에는 도움이 될테니 노부모가 있다면 미리 알고 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만 해도 휠체어가 필요하다는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야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이 아쉬웠다.

좋은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그만큼 건강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기에 아쉽다고 말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전동침대를 넣고 며칠도 안되어 집을 떠난 엄마 생각을 하면 상황이 어찌됐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화장장에는 새벽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든 직업인들은 다 유능하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엄마가 누운 관이 화장장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불과 몇 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아빠의 장례식 때가 자꾸만 생각났다.

결혼식을 2주 정도 남기고 입원했던 아빠는 결국 내 결혼식에도 오지 못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렸던 아빠를 여기 이 화장터에서 보내드릴 때 나는 엄마보다도 더 많이 울었었다. 간이 안 좋았던 아빠가 내 결혼식 때문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그렇게 갑자기 가신 것만 같아 죄송했고, 아빠를 더 많이 보살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한데 어우러져 너무나도 서러웠다.

그래도 그때는 엄마가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엄마마저 같은 곳에서 보내드리고 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울었던 걸까, 아빠를 보내드릴 때와 상황이 달라진 걸까.

걱정했던 것만큼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그때와 달리 나에게는 보살펴야 할 아이가 둘이나 생겼고, 나는 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엄마가 되었다. 장례를 끝까지 잘 챙겨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 눈물과 슬픔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아이들이 걱정스러웠고, 수목장에 필요한 서류부터 장지까지 따라가는 친척들을 서운함 없이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한없이 슬픔에만 잠겨있지 못하게 했다.

엄마가 가신 뒤에 남겨진 것에 아쉬움이 없게 하고 싶었다. 엄마를 보러 와 준 사람들을 서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고, 엄마라면 어떻게 사람들을 챙겼을지를 계속 생각했다. 그래야 먼 길 가는 엄마의 발걸음이 가벼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증명서와 함께 목함에 든 엄마의 유골을 모시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번에 향할 곳은 장례식의 마지막 장소, 묘원 공원이다. 다양한 장례 방법 중 우리가 택한 것은 수목장. 아빠의 납골당에 갈 때마다 얼마나 답답하겠냐며 혼잣말을 하던 엄마의 마음을 우리는 이렇게 풀어주려고 했다.

아빠와 나란히 산위에 묻혀 외롭지 않게 같이 자유롭기를 바랐다.  

차량 기사님의 주도 하에 장례식장에서 준비해 온 간단한 음식들로 마지막 제를 올렸다. 어제 문상 왔던 친구들이 발인 날 비 소식이 있다며 걱정해주었는데, 엄마 가시는 날은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떠 있는 맑디 맑은 날이었다. 눈을 감던 날처럼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이틀 뒤, 삼우제를 지내고 비석을 놓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칠재를 지내는 중이다.

다음 주에 동생이 멀리 해외 주재원으로 떠나기 전에 지난 주말, 가족 모두 모여 산소에 다녀왔다. 그리고 엄마가 남긴 것들에 대해, 앞으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결정의 기준은 '엄마가 가장 마음 편할 것 같은 대로, 우리의 우애를 지키는 방향으로'였다. 그것이 유언 없이 떠난 엄마가 우리에게 바라는 걸 거라는 생각이 든다.


늘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손도 잡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따뜻하던 엄마의 손을 잊을 수가 없다.

사별의 아픔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인생의 중요한 경험이다. 우리는 '고아'가 되었지만, 우리는 또한 아이들의 부모이기에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인생의 중요한 마디를 또 하나 남기면서 우리는 성숙해갈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며 지혜롭게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결정할 수 있는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엄마가 떠난 이후로 웰다잉, 존엄한 죽음에 대해 다시 해보게 된다. 적어도 나의 죽음은 아이들에게 맡겨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죽음을 슬기롭게 감당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 당분간은 나를 돌보는 일에 매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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