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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by allen rabbit

지하철이 도착했다. 나는 차를 놓칠까 조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배가 나와서 그런지 몇 발짝 뛰었다고 벌써 숨이 차다. 지하철 안에서 오래 된 시집을 꺼내 펼친다. 시집 속지에 그 시절의 난 이렇게 적었다. “흩어진 기억을 불러 모으는 그 주문을 잊자. 다시는 외지 말자.”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허수경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 술 마시는 곳 기웃거리며 술병 깨고 손에 피를 흘리며 여관에서 혼자 잠. 여관 들어선 자리 밑 미나리꽝 밝은 미나리순이 걸어 들어와 저의 손으로 내 이마를 만지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고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은 그렇게 가고...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눈은 뜨고 있지만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냐!” 비난받던 눈멀었던 시절. 세상과 맞서는 사람들을 쫓아 술집을 기웃거리다 술병이나 깼더랬다. 입에 묻은 오물을 쓱 문지르고 캠퍼스에 쓰러져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미래가 캄캄했다. 난 안 되겠네. 어려운 일 닥치면 도망쳐야겠다. 그렇게 나이 들고 적당히 속물이 되면 이따위 죄다 잊어버리겠지. 배 나온 아저씨가 되겠지. 그렇게 나를 수긍하던 시절.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냄비에 넣고 시가 될 때까지 불을 지피던 허수경이나 김남주 같은 시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스스로 시가 되어 이 세상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 그 시절 나는 맨발로는 아파서 잔디도 밟기 싫었다. 작은 아픔도 너무 아팠고, 기쁨은 낮을수록 흥겨웠다.

이제 나는 세상을 사랑해서 몸무게는 최고치고 종종 숨이 차다. 이제 어떤 무엇이 되자던 그 주문을 잊자. 다시는 외지 말자. 이제 이 책도 읽고 나면 멀리 치워야겠다. 저녁에는 부대찌개를 먹을 테다. 스팸도 추가할 테다. 나는 괜찮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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