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이 거의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이즈음 암초에 부딪히면 돌파를 잘 못한다. 부끄럽지만 실패는 이제 습관이 된 것 같다. 지난 십 년 이상 지속된 실패의 기억이 나를 이렇게 맥없이 만드는 모양이다.
스토너의 첫 장은 월리엄 스토너의 인생에 대한 짧은 묘사로 시작된다. 65살에 죽은 그는 미주리 대학의 영문과 조교수였으며, 학생들이나 동료들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소설은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이었던 유년시절부터 스토너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인생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복수와 배반, 통쾌한 일갈과 격렬한 투쟁이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만화 모두를 지배하는 이즈음의 추세와 전혀 반대의 길로 이 소설은 진행된다. 스토너는 조금 작은 성공을 이루었지만 크게 기뻐하지 않았고, 부족한 사랑에도 평생을 견뎠으며, 딸의 사랑을 잃고도 속수무책이었고, 처음 찾아온 진정한 사랑이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에도 그는 복수하지 않았다. 스토너의 삶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것을 탓하지는 않았다. 영문학을 사랑하고 한평생 연구했지만 뾰족한 성과를 이룬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는 수많은 암초와 시련이 있었지만 그저 조용히 참아낸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그렇게 참고 견디던 삶은 몸속의 커다란 암이 된 듯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가 영문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던 은사(恩師) 슬론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세상의 배신과 절망감에 연구실에서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스토너도 그런 세상의 배신과 절망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론처럼 늙어갈까 두려워하기도한다. 그러나 그는 답답할 정도로 이것들을 참아내고 침대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의 어마어마한 장점은 바로 이런 생생한 현실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리 지르고, 복수의 칼을 갈고 마침내 승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견디는 마음의 풍경을 스토너를 통해 소상히 풀어놓는다. 스토너가 암 선고를 받고 로맥스라는 교수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는 가장 선명해 보인다. 평생 그를 괴롭혔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괴롭히는 로맥스를 바라보며 스토너는 그를 미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한다. 모든 것에 승리하는 삶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어떤 삶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삶이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 평생을 매달려 무엇인가 굉장한 것을 이루어 내고,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에 시원하게 엿을 먹이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그것을 이루는 것만이 정답일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답하고 견디기만 하는 스토너의 삶을 가만히 소설로 지켜보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우리가 그중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해도 삶은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 아닐까?
슬론처럼 분노로 눈을 부릅뜨고 죽어도, 스토너처럼 외롭게 침대에서 죽어도 죽음은 공평하다. 죽음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거나 모두가 받아 쥐는 마지막 정답이다. 죽음보다 더 명확한 정답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 정답 앞에 더 낫고 더 좋고 더 멋진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