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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패맨 Sep 14. 2024

이노우에 나오야 6

사우스포를 상대하는 법

나오야의 입장을 챙겨보는 이유
풀턴과의 시합 당시 등장

 나오야의 시합은 그날의 빅 매치인 만큼 가장 마지막에 치러지기 때문에 언제 시작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앞선 시합들이 빨리 끝날 수도 12라운드 끝까지 할 수도 있기 때문). 이번 시합 역시 전체 시작은 16시쯤 했지만 나오야의 경기는 20시가 되어야 볼 수 있었다. 해서 주말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항상 시합이 끝난 후 집에서 full 경기로 다시 보기 한다.

 보통 복싱팬들은 보고 싶은 복서의 full경기나 하이라이트만을 챙겨보겠지만, 나는 나오야의 입장곡인 Sato Naoki의 Departure 듣기 위해 항상 처음 등장(ring walk라고 한다)부터 시청한다. Naoki의 Departure는 항공과 파일럿을 소재로 한 일본 드라마 [Good Luck!!]의 ost인 만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상하는 듯한 기분 좋은 쾌감과 마음속 깊은 곳으로 하여금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율이 무패의 통합 챔피언인 이노우에 나오야 선수의 등장과 찰떡같이 어울려서 항상 그의 입장씬을 시청할 때마다 나는 정말로 전율을 느낀다

 특히 풀턴과의 시합 당시, 입장곡 Departure와 함께 양쪽 화면으로 그의 전적이 카운트되면서 시합 당시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누가 기획했는지 정말 기가 막힌 연출이었다) 어느 순간 나오야가 천천히 등장해 ots의 하이라이트에 맞춰 더킹 위빙을 시작으로 셰도복싱을 하며 걸어 나오는데 이 모습은 여태껏 내가 본 스포츠 스타들의 등장 중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특히나 이때 당시는 다른 시합보다 유독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오야의 뒤로 걸어 나왔는 데 그 모습이 마치 만화책의 한 장면 같았으며 남자의 낭만을 자극하는 멋이 넘쳐흘렀다.  

이번 도헤니와의 시합 당시 스크린 영상

 이번 입장 역시 Sato Naoki의 Departure가 흘러나왔고, 먼저 거대한 스크린 위로 영상이 틀어졌다. 비장한 얼굴의 나오야가 스크린을 가득 매우자 이내 복싱 글러브를 낀 그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와 함께한 순간들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나오야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한 장면들은 퍽 감동적이었다(나오야를 비롯해 손흥민, 메이웨더 등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그들의 아버지로 인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스크린 뒤로 셰도복싱을 하는 나오야의 실루엣이 드리워지고 관객들의 환호와 함께 스크린이 벗겨지며 그가 손을 번쩍 들고 등장했다. 최고로 멋진 등장이었다. 그는 링 위로 올라서는 순간 역시 ots의 하이라이트에 타이밍에 맞추었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스스로가 복서 중의 복서임을 떨쳤다.

 그러나 입장이 끝나자 순식간에 ost가 꺼지고, 관객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무대를 중심으로 거대한 적막함이 흘러넘쳤다. 보는 내가 다 긴장이 될 정도의 무거움이었으며, 복서들의 마인드셋과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우스포를 상대하는 나오야
사진 출처 : Blue Collar Sports TV

 말론 타팔레스, 루이스 네리, 그리고 TJ 도헤니까지. 최근 나오야가 치른 3경기는 모두 사우스포(왼손잡이 복서)와의 대결이었다. 오소독스(오른손잡이 복서) 입장에서 왼손잡이 복서와의 대결은 흔하지 않기에, 상대의 리치나 스타일을 떠나 그저 마주 보고 자세를 잡은 순간부터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반대로 왼손잡이는 거진 항상 오른손잡이를 상대하기 때문에 불편함이 없다). 앞발이 밟히고 치이는 것은 예삿일이고, 앞손거리는 물론 뒷손 거리 역시 쉽게 계산되지 않기에 상대가 스탭을 잘 쓰거나 횡이동을 현란하게 해 버리면 오소독스입장에서는 자신의 사각이 노출되거나 공격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즉 복싱에 있어 사우스포는 그 상태만으로 이미 어느 정도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8급 석권의 괴물 파퀴아오, 탱크 저본타 데이비스, 현 P4P 랭킹 1위 올렉산드르 우식, 하이테크 바실 로마첸코(오른손잡이인데 왼손잡이 복싱을 하는 미친 인간.. 그만큼 사우스포의 유리함을 알고 있다는 뜻), 천하무적 테렌스 크로포드(사실상 양손잡이 복서), 샤커 스티븐슨 등 이 외에도 제법 많은 챔피언들이 사우스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찾아보면서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시 나오야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그가 지난 경기에서 네리에게 커리어 사상 최초의 다운을 허용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네리의 품 안에 파고들어 앞손 어퍼를 날리는 와중 뒷손가드를 올리지 않아 네리의 레프트훅을 맞으며 다운되었다. 나오야가 사우스포를 상대로 앞발을 먹힌 상황에서 뒷손가드를 내렸다는 사실은 그의 부주의 일수도 있으나, 어쩌면 그만큼 그가 네리에게 자신 있다는 모습을 대변해 주는 상황이기도 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나오야의 부주의(혹은 자만?)는 네리에게 무려 '몬스터(나오야의 링네임)의 다운'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앉겨주었다. 이외에도 타팔레스전 역시, 나오야는 상대의 앞손을 많이 허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이번 경기는 그가 사우스포인 TJ 도헤니를 상대로 과연 어떤 준비를 해왔는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TALKING BOXING TO THE MAX

 나오야는 경기 내내 도헤니의 앞발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여태까지의 사우스포와의 대결 중에서도 이번 경기가 가장 많이 걸린 듯 보였다. 경기 시작 후 날린 첫 잽부터 나오야는 도헤니의 앞발에 걸려 앞으로 의도치 않게 점프하듯 날아갔다. 뒷손으로 카운터를 치려는 순간 역시 앞발에 걸려 넘어질뻔했고, 앞발에 걸려 한 바퀴를 빙글 도는 황당한 장면도 펼쳐졌으며, 한 번은 나오야가 앞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 힘을 이용해 바로 연타를 날리는 모습도 중계되었다. 생각해 보면 도헤니의 몸 자체가 나오야보다 큰 데다가(+당일 계체시 몸무게가 나오야보다 약 3kg 이상 더 나간 것으로 알려짐) 무게중심이 좋고 스탭을 거진 뛰지 않은 채 앞발을 앞으로 쭉 내민 상태로 스탠스를 유지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그림이었다. 게다가 도헤니는 그 상태로 주먹 회피에 유리하도록 상체를 뒤로 젖혀 나오야가 정타를 먹이기 꽤나 힘들게 위치했다. 나오야가 워낙 중심이 좋은 선수라 그렇지,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했거나 만약 도헤니가 이런 순간들을 확실히 노렸다면 나오야도 상당히 위험할 뻔 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만큼 도헤니가 잘했다.

 자 그럼 나오야는 이 경기를 어떻게 풀어갔느냐.  일단 네리전과 달리 하이가드를 빠짝 올렸고 초심으로 돌아간 듯 스탭을 많이 뛰었다. 무엇보다도 전 경기와 달리 앞발을 확실히 상대의 (안이 아닌) 바깥으로 넣어 공격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로프를 등에 진 도헤니를 앞에 두고서 앞발을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와리가리를 주다가 한 순간에 왼쪽으로 빼 앞발을 먹으며 도헤니에게 원어퍼를 날리는 모습이 이 경기에서 제일 멋진 장면 중 하나였다. 나오야는 뒷손 바디 어퍼 외에도 뒷손 투를 많이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나오야뿐만 아니라 도헤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 출처 : NY Fights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뒷손이 멀다 보니 서로의 뒷손을 매우 견제했다. 또한 서로가 하드펀쳐라는 사실을 인지해 조심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오소독스와 사우스포였기에 양쪽 모두 뒷손을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소독스와 사우스포는 서로의 앞 손이 너무 자주 걸리기 때문에 뒷손을 먼저 내는 콤비네이션을 걸면 흐름을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 같은 이유로 앞손보다 뒷손을 깔끔하고 강하게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이 경기를 보며 관장님이 사우스포 상대로 왜 뒷손부터 내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찾고 공부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서로 뒷손 거리가 멀다 보니 두 사람 모두 훅이나 어퍼보다는 빠르고 강하고 길게 찔러 넣을 수 있는 스트레이트를 많이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7라운드 시작 장면을 보면, 나오야가 첫 주먹으로 뒷손 스트레이트를 내는데 느린 장면으로 봐도 주먹이 굉장히 빨랐으며 복싱의 이론을 정석으로 따르듯이 그 어떤 잔동작조차 없는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고 최단거리로 날리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보여주었다. 나에게 뒷손 스트레이트는 복싱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먹이자 가장 효율적인 주먹이기에, 각도기로 잰 것 마냥 정확하고 임팩트 있는 나오야의 스트레이트에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괜히 나오야를 보고 교과서 복싱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 그대로의 교과서처럼 복싱을 한다!). 그중에서도 뒷손 스트레이트로 복부를 치는 모습이 굉장히 잦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오야는 가드가 좋고, 도헤니는 상체회피가 좋다 보니 서로 복부를 해결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나오야는 치고 들어가며 위아래를, 도헤니는 복부 스트레이트를 시작으로 콤비네이션을 펼쳤다. 

사진 출처 : Sporing News

 결과적으로 도헤니는 6라운드 마지막 순간 주먹을 회피하던 도중 나오야의 레프트훅을 척추라인에 맞으며 짧게나마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맙소사 얼마나 아팠을까). 물론 등을 때리는 행동은 반칙이지만, 나오야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도헤니가 회피를 위해 이리저리 피하다가 맞은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7라운드, 도헤니는 시작부터 허리통증을 내보였다. 얼마 안 가 그는 한쪽 다리를 절며(디스크가 터진듯하다) 경기를 포기했다. 솔직히 도헤니 입장에서는 준비도 잘했고 '그' 몬스터를 상대로 경기도 나름 잘 풀어가고 있었던 걸로 보였기에, 척추 부상 때문에 경기를 포기한 상황 자체가 본인에게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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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정말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 재밌다. 내게 복싱이 그렇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무 복싱이나 재밌게 보지 않는다. 나는 나오야의 복싱을 보는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내가 동경하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선수인 데다가 무려 두 체급이나 unpisputed(반박의 여지가 없는) 세계 챔피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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