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했던 세계의 벽
갑작스레 성사된 미스매치
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예정되어 있던 나오야와 샘 굿맨의 경기는 샘 굿맨의 커팅부상으로 25년 1월 24일로 한 달 미뤄졌다. 그러나 다시 한번 커팅부상을 당한 샘 굿맨으로 인해 경기는 무산되었고, 대체자로 한국의 김예준 선수가 지명되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한국프로복싱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복서 김예준이라는 사람을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작년 5월 WBO 동양 챔피언을 획득했을 정도로 굉장히 잘 치는 선수다. 그러나, 잘 친다 잘한다의 기준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다. 필자가 꾸준히 적어온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노우에 나오야라는 선수는 그의 링네임 그대로 '괴물'이다. 동체급에서 적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P4P랭킹으로 따졌을 때 1.2위를 왔다 갔다 하는 세계제일의 복서다. 혹자는 별 인물도 없는 고만한 체급에서 최고일 뿐이라며 나오야를 비방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되려 나오야가 그만큼 압도적인 복서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오야가 쓰러트려온 복서들은 결코 고만고만하지 않았다. 물론 전성기가 지난 선수였지만, 노니토 도나이레 같은 훌륭한 선수와의 1차전 경기내용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즉 이런 이들이 고만고만해 보일 정도로 나오야의 기량이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오야가 최고로 평가받는 이유는 교과서 같은 복싱스타일로 정점을 찍은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싱을 모르는 사람이 한눈에 봐도 이해가능하도록 나오야는 간결하고 확실한 동작으로 상대를 무너뜨린다. 복서들 모두 개인에게 맞는 스타일이 있겠지만, 정석 자세로 세계 챔피언까지 갔다는 것은 누구나 파악이 가능한 기본기를 날고긴다는 선수들 조차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빠르게 사용한다는 말이 되고(즉, 알아도 대응이 불가능한 공격을 한다), 그렇기에 다른 동작이나 스킬은 두말할 필요 없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임드 세계 챔피언들도 나오야의 주먹에 맥을 못 추리고 쓰러지는 판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복서가 P4P 최상위 괴물과 붙는다는 것은 너무나 미스매치였다. 혹자는 기적이 있을 수 있다고 복싱은 그래도 모르는 거라며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사실 모두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록키]는 정말로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경기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경기내용 및 분석
경기를 보기 전 내 생각은 이랬다. 나오야가 원래 장점인 스탭을 살려서 경기한다면 승산은 제로일 것이라고. 왜냐 나오야의 인스탭(아웃스탭)은 전광석화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김예준 선수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예준 선수 스타일 자체가 뻣뻣한 데다가 스탭을 뛰기보다 발을 붙이고 카운터를 노리는 타입이라 나오야가 전매특허인 치고 빠지기를 해버리면 답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또한 나오야가 스탭 없이 인파이팅을 한다 해도, 빈틈을 정확히 노리는 오함마 같은 양훅과 나는 새도 떨굴 것 같은 살인 카운터 레프트훅이 있기에, 토투토(발 붙이고 싸움) 역시 승산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타팔레스는 왼손잡이로서 나오야를 상대로 인파이팅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오야의 바디샷을 거의 다 막아냈으며, 앞손으로 나오야를 상당히 괴롭히며 10라운드까지 끌고 갔기 때문이다.
.. 여하튼 내 생각은 이러했다. 그러나 경기는 더욱 처참했다. 나오야는 경기 전은 물론 경기 중까지 마치 기부금 후원하는 스파링 이벤트에 나온 것 같은 차분한 표정을 보여주었으며, 장담컨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라운드 사이 1분 휴식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일어나서 대기했으며, 전력을 쓸려고 할 때쯤 되자 김예준 선수는 KO 당했다).
나오야는 1라운드에 상대 스타일 파악 겸 거리를 재기 위해 잽이나 위아래를 몇 차례 던지더니, 2라운드 3라운드로 넘어갈수록 김예준의 리듬을 서서히 읽어버리며 카운터를 계속해서 집어넣기 시작했다.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나오야가 김예준의 정타를 몇 차례 허용한다. 하나 이것은 나오야가 일부러 힘을 뺀 부분도 있었을뿐더러, 카운터를 걸어보기 위한 시도 중 걸린 것에 불과했다. 나오야는 전매특허인 치고 빠지기 스탭을 거진 사용하지 않았고(월장 이후 인 앤 아웃스탭을 퍽 안 쓰게 된 것도 맞지만, 이번 경기의 경우 사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4라운드부터는 뒤로 빠지며 카운터를 노리는 김예준을 슬금슬금 따라가며 자신이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거리에서 김예준을 무너뜨렸다. 시그니처 기술인 레프트훅 카운터를 시작으로-레프트 바디-원투로 끝맺었다. 김예준은 원투를 맞고 쓰려졌음에도 오른쪽 바디를 감싸 잡으며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KO 된 것으로 보아 나오야의 레프트 바디가 너무 강력한 유효타였다.
김예준 선수를 포함, 많은 선수들이 나오야를 상대로 결국엔 링 끝에 몰려 샌드백이 되는 과정은 대부분 동일하다. 먼저 나오야에게 러시를 들어가거나 인파이팅을 시도하다가 레프트훅에 제대로 걸리며 크게 휘청거리게 된 뒤, 레프트훅을 견제하게 된 와중에 나오야가 너무 압도적인 펀치력으로 안면을 타격하기 시작해 자연스레 가드가 올라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오야는 귀신같이 레프트 바디를 꽂아 넣으며, 결국 바디에 쌓인 대미지로 발은 느려지고 포탄 같은 주먹은 쉴 새 없이 날아오다 보니(나오야의 체력이 말이 안 되는 부분), 자연스레 링 줄에 걸려 나오야의 샌드백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번 경기를 보며 알게 된 점이 있는데, 나오야는 인스탭 속도보다 뒷손이 더 빠르다는 점이다. 즉 반박자 빠른 인스텝으로 상대의 거리 안으로 쑥 들어가, 반의반박자 더 빠르게 뒷손을 낸다. 앞서 말했듯 나오야가 기본기 공격을 함에도 상대선수들이 대응을 못하는 이유이다. 나오야는 김예준 선수를 상대로 위'아래' 또는 원'어퍼'같이 앞손주고 뒷손 바디 공격을 많이 했는데, 놀랍게도 김예준은 나오야의 이 반의반박자 빠른 뒷손을 대부분 막아냈다! 물론 3라운드가 되면서 뒷손 정타를 허용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뒷손 카운터에 맞았을 뿐 나오야의 원투 박자 공격에는 잘 대응했다. 급하게 치러진 경기임에도 나오야에 대한 준비가 잘 된 부분이었다.
나오야의 시그니쳐 기술인 레프트훅이나 리버블로우는 준비한다고 대응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며, 한 번 겪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4라운드까지 버텨낸 김예준 선수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시합이 끝나고 나오야가 링 위에서 인터뷰하는 도중 김예준 선수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있었는데, 나오야가 그의 퇴장을 알아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박수를 치도록 유도한 행동이 참 매너있어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