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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나오야 8

몬스터의 저력과 줄어든 스텝의 향방, 그리고 원투

by 연패맨


1~3라운드
사진 출처 : San Antonio Express-News

1라운드를 보면서 든 생각은 라몬의 레프트훅이 꽤나 신경 쓰인다는 부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싱고(나오야의 아버지이자 트레이너)는 코너로 돌아온 나오야에게 "미기노 가드(오른쪽의 가드)"를 신경 쓰라고 강조했다. 라몬의 레프트훅 때문이었다. 2라운드, 나오야는 여전히 여유롭고 유연한 상체움직임과 가드를 보여주며 잽 레이백 잽 원투같이 괜찮은 공격들을 선보였고, 라몬은 가드를 단단히 붙인 채 뒤로 물러나면서도 계속해서 카운터를 노렸다. 특히 나오야의 잽 타이밍에 맞게 날린 라이트 스트레이트 카운터가 날카로웠다. 라운드가 채 20초도 안 남은 상황, 나오야가 뒷걸음질 치는 라몬을 쫓아가며 마지막으로 날린 레프트훅을 라몬이 피함과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올라오면서 체중을 실은 레프트훅을 나오야에 안면에 그대로 걸어버렸다. 나오야 커리어상 두 번째 다운이었다. 이때 나오야의 중심이 상당히 안 좋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무리하게 레프트훅을 맞히려고 앞발을 넣다 보니 두 발이 사선이 아닌 1자로 서게 되었기에 훅을 맞은 것은 둘째치고, 중심이 안 좋아 대미지를 그대로 맞으며 뒤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오야의 장기인 스텝을 쓰지 않은 것과 오른손 가드를 제대로 올리지 않은 것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라몬이 나오야가 예측 못한 방향으로 움직임을 전환하며 그대로 카운터를 올려친 것이 매우 훌륭했다. 나오야는 차분히 무릎을 꿇고 세컨에게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한 뒤, 주심을 똑바로 쳐다보고 일어났다. 곧바로 공이 울렸다.

3라운드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라몬은 나오야가 들어오는 타이밍과 그가 중심을 잡기 어려운 각도에 알맞게 레프트훅을 걸었고 나오야가 뒤로 밀려나는 상황이 펼쳐졌다. 위기상황, 그러나 나오야의 원투 3 연타가 적중하며 라몬을 뒤로 밀어버리기 시작한다(경기 내내 느낀 거지만, 나오야의 원투는 언제나 위기상황을 모면하고 공격권을 되찾을 만큼 상대보다 빠르고 막강했다. 나오야의 주특기는 레프트훅과 레프트바디지만, 나오야의 원투는 그가 가진 기본기 최강의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리전 이후, 나오야가 다운 후 보여준 멘탈만큼 놀랐던 것은 그가 (주먹을 완벽히 읽은 듯) 웬만하면 다시는 그 주먹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번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몬이 앞발을 돌리며 온몸을 틀어치는 엄청난 각도와 파워의 레프트훅을 나오야는 완벽히 읽은 듯(라몬은 나오야가 잽을 2번 째로 칠 때 보통 레프트훅을 걸었다) 잽으로 치고 피하기를 반복했다. 3라운드가 끝나자, 라몬의 세컨은 "바디 앤 어퍼"를, 싱고는 "히다리 보디(레프트 바디), (미기노)가드"를 주문했다.





4~8라운드
사진 출처 : JAPAN Forward

4라운드, 나오야는 라몬의 레프트를 의식해 오른손 가드를 바짝 올리고 잽을 다양하게 치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감이 붙었는지 나오야는 원투를 계속해서 던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오야의 원투는 라몬의 원투보다 반박자(어쩌면 그 이상으로) 빠르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라몬은 가드를 단단히 붙이고 원투를 막아냈지만 몸이 뒤로 밀릴 정도의 파워에 대미지가 축적되고 있었다(이렇게 카운터를 잘 치는 선수도 상대가 원투를 완벽하게 치고 들어오면 할 수 있는 게 가드 붙이고 막는 것 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나오야는 잽 2번에 레프트가 나온다는 것을 파악하고 잽슥 원투를 맞춘 뒤, 뒤이은 5 연타(주먹이 너무 빨라서 0.5배속으로 보고 난 후야 그가 원훅훅바디훅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에 이어 드디어 그의 주특기 레프트 바디가 뿜! 하고 터졌다. 이후 나오야는 라몬의 레프트카운터에 역으로 레프트카운터를 2번이나 읽어 치고, 라몬의 잽을 막고 스트레이트 카운터를 맞추면서 라몬이 뒤로 물러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다시 시작된 잽슥원투. 역시 나오야는 시작을 원투로 풀어나갔다. 나오야가 상대를 링 줄로 몰아붙여 뚜까패기 시작하는 소위 샌드백치는 거리가 만들어지면, 상대의 카운터가 모두 보이는 양(정말 상대가 샌드백처럼 보이는 양) 모든 공격을 회피하고 받아치며 매섭게 뚜까패기 시작한다. 4라운드가 끝난 뒤, 싱고는 나오야에게 여전히 레프트훅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5라운드, 한 번씩 들어오는 매서운 카운터를 시작으로 라몬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라몬의 레프트를 더킹과 스웨이백으로 싹 하고 피해버리는 나오야지만, 3라운드 이후로 자신의 가드가 떨어졌음을 의식한 듯 뒤늦게라도 오른손 가드를 바짝 올리는 나오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근접에서 바짝 올린 가드 역시 나오야가 라몬의 매서운 주먹을 확실히 인식한 듯 보였다. 또한 여전히 원투로 압박과 공격권을 가져가는 나오야였다.

6라운드, 나오야는 라몬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원투로 맞받아친 후, 훅투(원투랑 유사함) 3 연타로 라몬을 코너로 밀고 들어가 연타를 맞추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 World Boxing News

7라운드, 복싱은 원투를 시작해 원투로 끝낸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듯 나오야는 또 원투로 라몬을 쭉쭉 밀어냈다. 타팔레스가 나오야의 원투를 가드로 막았음에도 KO 당했듯이, 라몬 역시 원투를 가드로 막았지만 입을 벌리며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내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틈을 놓치지 않은 나오야는 잽을 날리며 뛰어들어간 점프력을 그대로 받아서 어퍼 양바디 연타를 제대로 꽂아 넣었다. 라몬은 가드가 풀릴 정도로 힘겨운 모습을 보였으나 이를 버텨내며 또 어마한 회피력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발붙이고 인파이팅을 시작하는 두 사람, 라몬이 레프트바디에 이은 훅을 치자 나오야의 가드가 떨어지며 밀리기 시작했다(이때 나오야 얼굴을 보면 '그 연타를 맞고도 이렇게 살아난다고..?'싶은 표정을 보인다). 뭐랄까.. 보는 사람 입장에서 나오야의 인파이팅만큼 재밌고 화끈한 거리는 없지만, 그의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인파이팅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황도 아닌데 스텝을 쓰지 않고 위험한 토투토(발을 붙이고 싸우는 격렬한 인파이팅)를 하는 그의 모습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밀리는 듯한 몸싸움을 겨우 밀어내 공간을 만들고 뒷손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킨 나오야는 물러서는 라몬을 쭉 따라가 뒷손 스트레이트 4 연타를 먹이며 가까스로 다운을 얻어냈다. 에이트 카운트 후 일어난 라몬은 빠꾸없이 앞으로 전진하여 원투로 쭉쭉 밀고 들어오는 나오야를 상대했다. 심지어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계속해서 레프트훅 카운터를 노렸기에 나오야 역시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후에 인터뷰에 말했지만 나오야는 라몬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했다고 말했다). 결국 버텨낸 라몬은 공이 울리며 살아날 수 있었다.

8라운드. 역시나 시작부터 뒷손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나오야, 라몬의 훅과 스트레이트를 공격방향에 따라 스웨이와 고개돌림으로 간단하게 피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몸싸움을 이겨내며 훅어퍼-바디-스트레이트 연타로 다시금 코너로 라몬을 밀어낸 나오야는 엄청난 연타를 보여주며 샌드백 두드리기를 시작하는데, 이때 심판이 이를 말리며 TKO로 나오야가 승리하게 된다. 꽤나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라몬이 여태 보여준 회피력은 그가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었기에 심판의 선언은 라몬입장에서 충분히 아쉬울만했다.





스텝이 줄어든 나오야의 향방
사진 출처 : Boxing Scene

전반적인 경기내용은 나오야가 우세했으나, 다운되었던 2라운드를 포함한 몇몇 라운드에서 나오야는 상대의 타격에 가드가 떨어지거나 분명 힘들어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만큼 라몬은 훌륭한 복서였다. 위기상황을 모면하는 뛰어난 방어력과 꿇지 않는 결의, 날카롭고 무거운 카운터 등 이만큼이나 나오야를 밀어붙인 선수는 또 없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나오야의 경기를 거진 다 시청해 본 사람으로서 그가 중심을 잃거나 힘든 표정을 짓는 장면은 처음이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만약 그가 체급을 조금 더 올린다면, 여전히 이길 확률은 높을지언정 또 다운되거나 힘든 싸움을 해야 할 확률 역시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체급이 올라가면서 그가 스텝을 예전만큼 못 쓰게(안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오야는 분명 꽉 찬 육각형 복서이지만, 그중에서도 그를 최상의 복서의 자리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레프트훅도 레프트바디도 아닌 스텝이라고 생각한다. 나오야의 폭발적인 대쉬와 인 앤 아웃은 그 어떤 복서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자신보다 리치가 긴 선수를 잽 싸움에서 이긴 이유도, 자신만큼 기술이 좋은 선수가 유효타를 쉽게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도, 나오야의 인 앤 아웃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나오야는 인파이팅에서 라몬과 비등비등하거나 살짝 위험했으나, 중거리 싸움에서는 라몬을 거의 압도했다. 나오야가 거의 무적이 되는 코너로 몰아놓고 샌드백 패는 거리나 원투 치는 것을 보면 그의 스텝과 대쉬력의 뛰어남은 물론 거기서 나오는 (반드시 맞춘다는) 자신감과 자로 잰듯한 거리감각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경기 중 그가 가장 멋있었던 장면들도 스텝으로 라몬의 레프트훅 카운터를 회피하거나, 공격을 막은 후 백스텝으로 대미지를 털어내듯 재정비하는 모습, (스텝이 만들어 낸) 4 연타 원투에 있었다.

사진 출처 : USA Today

물론 앞으로 나오야의 스텝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P4P랭커일 것이고, 인기 있는 복서일 것이라 장담한다. 그가 보여준 냉철함과 다운 후 오히려 더 강해지는 괴물 같은 면모는 물론, 관객들이 원하는 화끈한 복싱을 구사하는 스타일 때문이다. 잽을 던질 때마다 라몬이 귀신같은 레프트훅을 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오야는 되려 피하지 않고 잽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토투토의 싸움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오야는 그가 유리한 중거리싸움이 아닌 인파이팅을 선택했다. 나오야는 물러섬이 없는 전사 그 자체였다.

나오야가 체급을 올린 만큼 이제 예전 같은 인 앤 아웃은 더욱 보기 힘들겠지만, 어느 순간이든 그가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면 상대방은 기필코 뚜들겨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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