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
MBTI에서 T 성격 유형은 공감능력이 떨어지다고들 하죠. 저도 T 인간으로서 반박을 하자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기보다, 문제해결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편이라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어려움을 토로할 때 '그래 네가 참 힘들겠구나' 보다는 '어떻게 하면 네가 안 힘들겠니?’ 혹은 ‘이러이러하게 해 보면 어때?’ 하는 말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공감능력이 자칫 부족해 보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한편 저와 함께 사는 INTP 인간을 보면, 공감능력에 있어서 다른 T형들과는 또 다르게 구분 지어지는 독특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INTP를 향한 통상적인 선입견과 같이 그야말로 공감능력제로(a.k.a 공능제)인 것 같다가도, 한없이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댁에서 INTP 인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던 차 안이었습니다.
INTP 인간 : 훌쩍훌쩍 (웬일인지 코를 훔치는 중)
나 : 왜 그래. 감기 기운 있어?
INTP 인간 : 아니..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 으허허허허허헝 (대성통곡 시작)
나 :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놀람)
INTP 인간 : 아니.. 장모님이 네 얼굴이 안돼 보인다고 하셨잖아. 으허허허허허허허헝 (눈물 콧물 다 빼는 중)
나 : 아니 그냥 살 좀 빠졌다고 한 것일 뿐이잖아… 왜 그러는 거야. 난 행복하다고!!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
운전 중이던 INTP 인간이 한참 코를 훌쩍이더니 종국에는 오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평소 시니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이보다 앞선 대화에서 저는 INTP 인간과 회사일로 논쟁을 하다가 INTP 인간의 예의 그 시니컬한 태도로 인해서 기분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회사에서 이러이러한 고민이 있는데- 하였더니 그건 이렇게 대처하면 되는데 뭘 그리 갑갑하게 구느냐- 하는 식의 답변을 들은 다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내가 고민하는 회사일에는 그토록 냉랭하게 굴더니 난데없이 눈물을 펑펑 쏟다니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차 안에서의 때아닌 눈물바람은 수시로 부모님 댁을 드나들던 결혼 초(매거진 3화 참조)의 일입니다. 바로 수 주 전에는 또 비슷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였으나, 급 화해모드로 전환 후)
INTP 인간 : 으허허허허허헝 (또 갑자기 대성통곡 시작)
나 : 울어..? 왜 그래 (또 너무 놀람)
INTP 인간 : 아니.. 내가 진작에 이러저러하게 했으면 됐는데 그걸 너무 늦게 알아서 아까 싸웠잖아.
나 : 아이고. 지금 다 풀고 잘 놀고 있었잖아. 괜찮아.
INTP 인간 : 아니 내가 이러저러하게 했었으면 처음부터 싸울 필요가 없었던 거였는데.. 으엉..
말다툼을 할 때와는 다른 사람인 양 갑자기 눈물을 쏟는 통에 저는 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패턴입니다. 전연 공감해주지 않다가, 돌연 우는 모양새라니 제 입장에서는 당최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러우며, 이 사람의 감정 회로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INTP 인간은 공감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도리어 넘치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공감이라 말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라 말하는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톺아보아야겠습니다. 공감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이 대표적이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잘 느끼고 나아가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 인지적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을 잘 인식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때 상대방의 입장이란 생각과 감정을 포괄하는 것이므로, 언뜻 보기엔 두 가지 공감의 차이가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전자는 타고난 능력이고, 후자는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큰 차이입니다.
앞서 언급한 일화에서 INTP 인간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제 감정에 동조했다기보다는, 제 입장을 사후적으로 인지하고, 비로소 이해하였을 때 나온 눈물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게 어떠한 식이든 상처를 주었다는 자각이 눈물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INTP 인간은 정서적 공감에는 취약할지언정 인지적 공감 능력은 오히려 굉장히 뛰어난 것이 아닐까요? 저는 '내가 힘들다고 할 때는 아무렇지 않아 하더니- 내가 그렇게 울 때는 눈하나 깜짝 안 하더니- 갑자기 자기가 왜 울어?' 하는 생각에 무척 당황스러웠는데요.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공감을 따로 떼어놓고 보니 문득 이해가 됩니다. 정서적으로는 동조하지 못하였어도, 깨달은 바가 있으면 펑펑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 바로 INTP 인간입니다. 특히 인지적 공감이 후천적으로 학습하여 얻어지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뛰어난 지성을 지닌 그들의 인지적 공감 능력이 우수한 것은 매우 이치에 닿는 일로 보입니다.
이러한 높은 인지적 공감 능력 덕분에, 오늘도 저와 함께 사는 INTP 인간은 각양각색 인간 군상들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뉴스를 보며 모 나쁜 인간을 욕합니다. 이에 INTP 인간은 저 입장되면 뭐, 저렇게 못되게 살 수도 있겠지- 합니다. 그 나쁜 인간을 대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지적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날 뿐.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나중에 그렇게 울지 말고, 처음부터 빠르게 제 입장에 인지적 공감을 해주면 안 되는 걸까요? 저 뉴스 속 나쁜 사람에게 잘도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Tip
INTP들은 자책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좁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기에,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 잘못하였을 때 더더욱 자책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고
공감의 한 종류로 행위적 공감이란 것도 있다고 하네요. 상대방의 입장에 정서적, 인지적으로 동조하였으면 이를 돕기 위한 실천적 행동을 하는 차원을 말합니다. INTP 인간이 여기까지 뛰어난 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
덧
이 글을 쓰기 위해 주로 정신의학신문의 이 기사를 인용하였습니다. INTP 인간과 더불어 잘 살려다 보니, 나날이 똑똑해지는 기분입니다!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6화 :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
7화 : 남편이 산후우울증에 걸렸습니다.(애는 내가 낳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