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 =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INTP 인간은 사회가 정해둔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행동하기를 두려워 않는, 타고난 자질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탈규범적으로 살려면 어느 정도 치열해야 할 것도 같은데, 그런 투사 같은 모습은 또 없습니다. 그것 좀 아닌 거 같은데? 난 이렇게 할래- 그저 그뿐.
이런 INTP 인간이 결혼으로 인해 막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게 됐을 때의 일입니다.
4월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5월 어버이날을 시작으로 조카의 돌잔치, 부모님의 생신 등 각종 행사로 결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가를 자주 오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매주 가족행사를 치르느라 둘만의 시간 없이 보내던 중,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에선가, 주말에 집에 좀 들르거라 하는 제 부모님의 호출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나 : 이번주 일요일에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 가야 할 것 같아.
INTP 인간 : 또 간다고? 저저번주에 갔잖아.
나 : 이런저런 이유로 밥 같이 먹자 하시네.
INTP : 주말에 또 갈 순 없어.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순 없어.
(어떠한 각색도 없이 워딩 그대로를 적어봅니다.)
나 : 뭐라고? 푸하하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순 없어.
이 말이 참으로 생경하게 들렸달까요. 특별히 용법이 틀렸다거나, 조응이 안 되는 문장도 아닌데 듣는 순간 박장대소를 하였더랬습니다. 친구들에게 ’야 인팁인간이 뭐래는 줄 아니‘ 하며 들려주었더니 ‘그래 인팁씨라면 그럴 것 같다’ 하며 웃는 친구들이 반, ‘헐 그런 말 들으면 화 안나? 충격인데?’ 하는 친구들이 반입니다. 후자는 왜인지 그분들이라는 표현에 조금 더 꽂힌 것도 같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이나 장인어른, 장모님이 아닌 ‘그분들’로 완벽히 내 부모님을 타자화한 지칭부터, 부모님 댁 방문을 ‘자식 된 의무’ 보다는 ‘친해지기’로 해석한 것까지- 그는 나의 부모님을 만나는 일을 부모 자식 간 관계에 앞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꼭 해야 해서 하는 어떤 절차같은 것이 아닌, 친해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 것일 테고요. 이 INTP 인간의 사고회로와 직설화법은, 같이 사는 저에게도 제법 충격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꽤나 담백하기까지 하고, 가장하는 것 하나없이 꾸밈없게 들려 감탄했습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나도 시부모님들과 그렇게 친해지고 싶진 않은걸.
‘친해지다’라는 표현을 곱씹어 보며 내심 찔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내가 며느리를 잘 보았구나, 며느리 덕에 내 아들이 보기 좋게 잘 사는구나 하는- 이것이 중요했지 그분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부모님에게도 독립한 자식으로서 일종의 전시 행위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술 한잔 따르며 장인어른에게 살갑게 구는, 장모님 음식 솜씨에 연신 감탄하는 그런 사위. 다같이 하하 호호 웃고, 엄마 나 결혼 잘했지? 하며 내심 뿌듯해지는 그림. 나의 배우자를 수단화한 것이 아닐까 반성까지 했다면, 너무나 비약일까요?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이 나와 INTP 인간 둘이서 꾸린 가정의 행복 증진에는 그닥 기여한 바가 없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후로 저는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면, INTP 인간의 에스코트를 받아 부모님 댁에 ‘혼자’ 방문합니다. 이때 왜 인서방은 같이 들어오지 않느냐는 부모님의 질문에는 대충 ’아 회사 팀원 결혼식이래 ‘ ’ 내가 뭐 좀 부탁했는데 오래 걸린다네 ‘ 등등의 핑계로 무마합니다. 제가 엄마 밥 얻어먹는 동안 INTP 인간은 근처 영화관이나 서점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요새 인서방은 차에 앉아있는 것만 보네’ 하는 부모님의 뾰족한 말 정도는 가볍게 넘겨줍니다. 처음에는 저도 ‘내려서 인사는 해야 하는 것 아냐?’ 하며 꽤나 좌불안석이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렇게까지 친해질 순 없는 사람들인걸요.
이처럼 INTP 인간의 ‘부모님과 거리두기’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저도 ‘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안부전화를 하는 며느리였습니다. 이 때때로의 주기는 점점 느슨해져, 지금 보니 저와 시부모님과의 마지막 전화통화는 두 달 전쯤이군요. 이렇게 거리를 두니 더욱 무탈합니다.
Tip
INTP 인간이 계통, 관습을 무시하며 나만의 길을 나아갈 때, 못 이기는 척 그가 개척한 길을 좇아가 보세요. 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나 편합니다. (마음이 처음에만 조금 불편할 뿐!)
경고
INTP 인간에게 ’일반적인‘ 수준의 사회성을 기대하지 마세요. 원한다면 학습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과중한 사회적 압력을 받으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요. 예의와 도리는 지키되 나만의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덧
적고 나니 저의 거리두기란 대단찮은 것 같기도 합니다. 더 현명한 방법으로 두 사람의 시간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부부들이 더 많이들 계실테지요.
저와 함께사는 INTP 인간은 아주 어릴 때부터 김치를 먹지 않는데요. 김장을 하는 데에 드는 과도한 노동이 싫어 김치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늘상 주장해 왔답니다. 생각해보니 그래, 넌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는 것에 알러지가 있었던 거구나..?!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6화 :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
7화 : 남편이 산후우울증에 걸렸습니다.(애는 내가 낳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