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반지 없는 결혼
결혼 과정은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일들의 연속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안 싸우던 커플도 결혼 준비 시작하면 싸운다'는 이야기가 다행스럽게도 제 일은 아니었기에, 결혼 과정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지금도 결혼 준비할 때를 생각하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결혼반지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혼반지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결혼반지를 '결혼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반지'로 해석하면 통상적으로 3가지 종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편의상 우리 사회에 가장 많은 형태인 헤테로 커플을 예시로 하겠습니다.)
1.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며 여자에게 주는 반지 - 통칭 프로포즈링
2. 여자가 남자의 가족에게 받는 반지 - 통칭 예물 반지
3. 두 사람이 나누어 끼는 커플 반지 - 통칭 웨딩 밴드
결혼반지에 대한 시장의 통계가 존재한다면 인용하고 싶습니다만, 아마도 정확한 자료는 없지 싶습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나, 지인들의 사례로 비추어 요즘의 대세를 추정해 보자면 1은 대부분 생략, 2는 결혼 당사자들의 의지치 보다는 양가 어른들의 의지로 결정되며 많이 생략하는 분위기, 3은 많은 이들이 필수로 여김- 정도로 보입니다. 결혼반지-라고만 하면 3과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결혼 전후, 반지1,2,3은 대략 아래와 같은 과정에 의해 구매하고, 쓰이게 됩니다.
1. 프로포즈링
프로포즈를 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선물로 주는 것이나, 실상은 결혼하기로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명목상의 프로포즈를 하며 건네게 됩니다. 프로포즈링을 받은 사람은 결혼 준비를 하며 이것을 착용하고 다닐 수 있고, 주변에 자연스레 결혼 준비를 미리 알릴 수도 있습니다. 결혼 당사자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프로포즈와 프로포즈링이 필수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화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상대방의 의중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프로포즈링은 존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반지의 '스펙'도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받고자 하는 사람이 구체적인 스펙까지 마음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명목상의 프로포즈'가 일반적인 문화인터라, 두 사람이 같이 프로포즈링을 쇼핑하게 되는 상황도 더러 있어 보입니다.
2. 예물 반지
보통 상견례 후, 예물 전반에 대한 대략적인 양가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서, 남자의 부모(주로 어머니)와 결혼 당사자인 여자가 함께 예물 반지를 쇼핑하러 갑니다. 예물 반지 이전에 예물이란 것을 짚어보자면 두 사람의 결혼의 증표로서 서로 선물하는 물건들을 일컫는 것이므로, 정해진 것은 없고 다 하기 나름입니다. 다만 주로 여자는 다이아 반지를 비롯한 보석류를 받고, 남자가 받는 것은 시계가 대표적입니다. 요새 여자가 받는 예물로는 명품 핸드백이 선호되기도 합니다. 예물은 그 품목과 예산의 규모가 그야말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데다가, 결혼하는 두 사람이 아닌 어른들의 의중을 중심으로 결정되는 항목이므로, 조율에 실패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어른들은 시원하게 말하는 법이 드물고, 본심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야기하는 성향을 탑재하고 있는 관계로, 예물이란 것은 안하기로 했으면 모를까, 하기로 한 이상 초반에 세부적인 것까지 빠르게 합의를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예물 반지로 돌아와서, 이것은 실제로 착용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공동 자산으로서 취급되며 결혼 후 집안 장롱 어딘가에 보관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3. 웨딩 밴드
쉽게 말해 커플링입니다. 백화점 1층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주얼리 브랜드나 귀금속 상점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다양한 디자인과 가격대의 상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이 반지를 예식에서 나누어 낍니다. 보통은 결혼을 준비하며 당사자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만한 것을 후보로 꼽고, 몇 군데의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껴보고 나서 최종 구매를 결정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도 일상적으로 착용합니다.
저도 대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1,2의 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네, 저는 INTP 남자와 살고 있는 여자입니다:)) 남들은 쉬이 생략하기도 하는 것들을 갖게 되었으니, 전후 번잡한 과정과 고가의 물건이 함의한 의무 따위의 것들을 상기하지 않고 심플하게 보면, 이 반짝거리는 물건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을 일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
나 : 이제 남은 것들이.. 예단은 우리 집에서 준비를 할 거고.. 우리 반지를 사야 돼!
INTP : 반지를 사? 반지를 또 산다고?
나 : 어. 우리 웨딩 밴드를 해야지. 커플링.
INTP : 넌 반지가 이미 두 개인데. 또 사면 결혼반지가 3개야?
나 : 그러게. 네가 준 프로포즈링, 어머님이 주신 반지, 커플로 낄 웨딩 밴드 하면 내 반지는 3개네.
INTP : 2개가 이미 있는데 반지를 또 산다고? 왜?
(대략 이런 식의 핑퐁이 계속)
나 : 우리 둘이 커플로 낄 반지가 필요하잖아.. 사람들한테 물어봐. (여기서부터는 짜증이 밀려옵니다.)
INTP : 또 사면 결혼반지가 3개인 건데. 난 이해를 못 하겠어. 반지를 또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 : 하.. 근데 그럼 너는 결혼식에서 반지 교환할 때 뭘 낄 건데?
INTP : 글쎄.. 근데 난 어차피 반지가 안 어울리잖아.
나 : 그럼 결혼반지도 없이 결혼하겠다고?
INTP : 너한테 반지가 2개가 있잖아.
나 : 하.. 알았어!! (대략 포기)
이 INTP 인간이 3개의 결혼반지를 납득할 수 없는 까닭은 단순히 이것을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웨딩 밴드 구입 시 본인이 생각한 예산에서 벗어난 추가 지출이 일어날 것이라 곤란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왜 결혼에 필요한 반지란 것이 3종인 건지- 그러한 룰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우리는 반드시 그 룰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이고, 그 이유를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3번째 반지의 존재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3개의 반지' 사건은 결혼식을 앞두고 정말로 급박해진 제가 '너도 나처럼 블링블링하게 손에 낄 거 그냥 하나 사'와 같은,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은 말로 읍소하여, 웨딩밴드로 유명한 모 브랜드의 모델 중 남자 반지만을 구매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결혼식에서 브랜드도 다르고, 그러니 당연히 모양도 다르고, 심지어 색깔도 다른 반지를 나누어 꼈습니다.
돌이켜 보면 INTP 인간의 문제 제기는 옳습니다. 프로포즈링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그가 기꺼이 선물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예물 반지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웨딩 밴드를 꼭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둘 다 아니었습니다. 저는 결혼식에 필요하니까, 결혼의 상징적인 징표이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응당 사야 한다-라고 결론 내린 반면, INTP 인간은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프로포즈링은 내가 네게 주고 싶어 주었다, 예물 반지는 나의 어머니가 예비 며느리에게 주고 싶어 주었다, 제3의 반지는 누가 너와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반지1,2는 있고 3은 없이 결혼했습니다. 제 배우자인 INTP 인간은 3만 가지고 결혼했습니다. 정리해 보니 결국 우리 부부가 보유한 결혼반지는 총 3개입니다. 그래도 결혼하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웨딩 밴드 없는 부부가 되었을 뿐입니다.
아, 그리고 제가 획득한 반지1,2는 영 거추장스러워 오늘도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INTP 인간의 반지3은.. 글쎄요. 부디 서랍 어딘가에 잘 있길 바랍니다.
Tip
INTP 인간의 '왜'라는 물음에 같이 참여해 보세요. 결코 당신을 괴롭게 하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답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특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관행이라면 단호히 거부합니다. INTP의 문제의식에 동참한다면, 참신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경고
'원래 그런 거야. 남들도 다 그래.'라는 말은 INTP 인간의 한쪽 귀로 흘러들어 갔다 그대로 반대쪽 귀로 나오게 될 겁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히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적일 겁니다.
덧
결혼 문화라는 것에 비합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 적은 결혼반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갖고 싶고, 여력이 된다면야 가지면 좋겠지요. 하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에서 온걸까, 여기서부터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초보 브런치 작가는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6화 :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
7화 : 남편이 산후우울증에 걸렸습니다.(애는 내가 낳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