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는 내가 낳았는데 말이죠.
저와 INTP 인간은 둘 다 꽤나 선진적인 기업문화를 갖춘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육아휴직 제도가 남자 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으며, 자유롭게 이를 사용할 수 있는 합의가 어느정도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어 INTP 인간은 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1년 간 휴직 후 아이를 직접 돌볼 것을 자처하였습니다. 저는 3개월의 출산휴가만을 쓰고 바로 직장으로 복귀하기로 되었습니다. 이때 INTP 인간의 휴직 시작 시점은 출산일부터로 하여서, 우리 부부에게는 최초 3개월 간 둘이서 온전히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아주 윤택한 컨디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앙의 시작일 줄은… 이때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로 징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본격적인 발단은 조리원에서 신생아를 데리고(모시고) 집으로 와 처음 옷을 갈아입혔던 때였습니다. 신생아 ‘속싸개’를 해본 분이라면 알 것입니다. 처음 넥타이를 매어 볼 때와 같이 마음처럼 쉽게 안됩니다. 물론 저와 INTP 인간 둘 다 손재주가 더럽게 없긴 합니다만, 기저귀를 갈고 속싸개를 다시 싸매는 데에 거진 10분은 넘게 걸린 참이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하였고 아기는 그사이 점점 목이 쉬어라 울어재끼고 있었습니다.
나 : 조리원에서 배우긴 했는데 애가 우니까 진짜 안된다… (낑낑대며 열심히 싸매는 중)
INTP 인간 : 난 못하겠어 이건 뭔가 잘못됐어. (방 밖으로 나가 버림)
난 못하겠어 이건 뭔가 잘못됐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나가 버린 게 더 큰 일. 믿어지세요?) 아이가 좀 심하다 싶게 울긴 했습니다만,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암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기로 서니, 이제 막 총알이 빗발치는 육아 전선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발언이야 말로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한 마디 말과 함께 박차고 나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제 심장은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로 한참 동안을 INTP 인간은 아이를 전담하여 케어한 적이 없으며, 저보다 새벽에 먼저 일어난 적이 없고, 아이가 울 때 먼저 달려간 적이 없었습니다. 본인이 육아휴직 중이었고, 저는 아직 출산 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말입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제 몫이었고, 특히나 가장 힘든 새벽 육아는 오롯이 제 몫이었습니다. 한 달 반 만에 저는 기혼 여성들이 주로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들락날락하며 양육권과 친권 개념을 숙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토록 유별나서 더더욱, 남들과는 다른 아빠와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는 산산이 깨어지고 무참히 공격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밖에서 따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겠으나 구구절절 쏟아내지 않고는 못 견딜 상태였습니다. 한참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친구가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 그거 산후우울증 아니니.
나 : 뭐? 산후우울증?
친구 : 아이라는 존재를 잘 못 받아들이는 거 같은데. 그게 산후우울증이지 뭐.
나 : 아니 애는 내가 낳았는데 왜…
산후우울증이라.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곱씹어 봅니다. 저와 함께 사는 INTP 인간이 항시 게으르며, 자주 엉뚱하고, 매사 충동적인 것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정도를 한참은 넘어선 시점이었습니다. 세상에 자고 싶을 때 못 자고, 먹고 싶을 때 못 먹는 생활을 반겨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감당하기 힘든 타입의 사람이 분명 존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이 INTP 인간이라면... 안타깝지만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유독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생아 육아는 싸움이나 전쟁으로 치면 지능전이 아니라 육탄전 같은 것입니다. 똑똑한 머리보다 무쇠 같은 팔뚝과 하루쯤은 밤을 꼬박 지새워도 괜찮을 체력이 훨씬 가치 있습니다. 그런데 INTP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빛나는 지성이 아니었는지요. 물론 아이가 왜 우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아이가 이럴 때 웃고 이럴 때 편안해하는구나를 알기 위해서 통찰력과 추론력이 필요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까닥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엉덩이와, 시시각각 더럽혀지는 것들을 닦고 치워낼 재빠른 손입니다.
똥기저귀는 그냥 기계처럼 갈아내야 하는 것이지, 왜 아기가 어제는 아침에 쌌다가 오늘은 점심에 싸느냐에 천착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부분 중 하나가 손은 항상 제가 놀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암흑기 중에도, INTP 인간이 결코 육아를 등한시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관심이 많고, 늘 공부하려는 자세만큼은 오히려 훌륭했다 할 것입니다. 실은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육아서는 INTP 인간이 구입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아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앉았을 때(그놈의 왜!!) 저는 손목과 무릎 관절이 닳도록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아! 이래서야 이 시스템 속에서 철저히 소진되는 것은 오로지 저뿐입니다.
또한 INTP 인간이 가장 못하는 일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정해진 루틴을 기계처럼 따르는 것입니다. INTP 인간은 대개 생활이 불규칙적이고, 주변 정리가 잘 안 되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생후 한 달짜리 아기가 이런 생활양식을 배려해 줄 리 없습니다. 신생아는 서너 시간에 한번씩 찾아오는 밥때에 밥을 안 먹으면 큰일이 나고, 오밤중에라도 서너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 울지 않으면 좀처럼 자라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은 INTP 인간에게 고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합해 보니 INTP 인간에게 신생아와 함께 살기란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한편 신생아 육아가 전쟁이라면, 부부 사이는 흡사 전우와 같을 겁니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INTP 인간일지라도 전우이니 어찌할까요. 그가 남들보다 더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저는 전략을 달리했습니다. 애는 원래 운다, 왜를 생각하지 마라, 물론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한 후에 파고들자- 하며 멱살 잡고 끌어주기에 집중했습니다. 패닉 된 전우도 내 전우이니 일단 살리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끌어주지 않으면 나도 같이 죽을지 모르니..)
전력 외 전우와 함께 넘는 전선은 매일이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힘들었고, 어떤 날들은 이렇게 반추하며 적기가 버거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힘든 날과 기쁜 날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도 흘러 마침내 요즈음은 자못 평화로운 날들입니다. 제법 여유가 있어지니 아이가 신생아 때의 일들이 또 달리 보이긴 합니다. 정말로 저와 함께 사는 INTP 인간은 산후우울증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이 되실까요? 정말 INTP 인간에게 육아란 그토록 최악의 일일까요? 매거진 다음 화에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경고
INTP 인간의 특징을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느긋하다기보다는 많이 게으릅니다. 해야 해서 하는 일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면 죽는 줄 아는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간입니다. 사실 신생아를 키우기에는 최악의 스펙입니다. INTP가 신생아와 함께하게 되었다면... 그냥 시간이 지나기를 기도하세요.
Tip
육아라는 세계의 문이 열리면, 어차피 그동안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장식품 정도에 불과하고, 약점들은 낱낱이 발가 벗겨져 하나하나가 걸림돌이 되더군요. 모두가 그러하니 INTP 인간이 유독 더 그렇다고 해서 또 아주 최악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
덧
남사친 하나가 제게 그럽니다. "야, 난 군대에서 말뚝 박을라고 했었어. 진짜 잘 맞았거든. 육아도 비슷해. 군대 있을 때 생각하면 돼. 군인 정신으로! ok?" 그 친구, INTP는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