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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Jul 03. 2021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들 둥이는 집에서 별명이 ‘사우디 왕자’다. 친정에 아이라고는 조카와 둥이, 둘 뿐이어서 어려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 삼촌, 온 가족이 둥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만나면 온갖 선물 공세를 펼치고 갖은 아양을 떤다. 어린애 하나에 여러 명의 어른이 쩔쩔매는 게 웃기고 배도 좀 아파서 나는 종종 “둥이 보면 사우디 왕자도 울고 가겠네”라며 비꼰다.


온갖 맛있는 건 아이들 입으로 먼저 들어가고 철마다 때마다 당연한 듯 선물을 받고 집안의 모든 결정이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 태어난 아들이 가끔 부럽고 샘난다. 다행히 무서운!!!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서 둥이는 아직 사우디 왕자처럼 거만하지는 않다.


내가 어릴 땐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남녀 차별이 당연했다. 집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집은 무척 엄격했다.

식사 때는 아버지가 수저를 드셔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먼저 드신 반찬만 먹을 수 있었다. 간혹 맛있는 과일이나 먹을 것이 선물로 들어와도 아버지가 퇴근해서 맛보실 때까지 구경만 해야 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아버지 옷을 수선하느라 바닥에 펼쳐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옷을 발로 넘어갔다가 온갖 욕을 다 먹었다. 감히 아버지 옷을 발로 넘어갔다는 이유이다. 밟은 것도 아니고 그냥 넘어갔을 뿐인데, 여기까진 괜찮다 아버지니까. 그런데 오빠는 문제가 좀 달랐다. 오빠도 아버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는데, 3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오빠를 아버지 모시듯 해야 했다. 오빠는 집안의 거의 모든 심부름과 노동에서 제외되고 내가 물도 떠다 바쳐야 했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무. 엇. 이. 든. 오빠가 먼저 하고 남을 때만 내 차지가 되었다. 오빠 생일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갈비에 잡채, 전, 각종 나물까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졌다. 내 생일에도 미역국은 있었던 것 같은데 딱 그것뿐이었다. 나중에는 그것도 종종 잊혔다. 그나마도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동생한테까지 밀렸다. 오빠는 아들이라, 동생은 막내라.


한데 이런 차별은 완전히 어머니 주도하에 이루어졌지, 아버지는 전혀 권위적이지 않으셨다. 중간에 끼어 오빠와 동생에게 다 빼앗기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아버지는 나에게만 몰래 과자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시고, 한 번씩 학용품도 오빠 거보다 좋은 걸 사주셨다. 식사 때 가끔 아버지와 오빠에게만 허락되던 굴비나 소고기 반찬 등을, 배부르다며 남겨주셨는데 나는 어머니의 매서운 눈총을 모른 체하며 홀라당홀라당 먹어버렸다. 밥상에서 아버지가 오늘도 배불러서 반찬을 남겨주시길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지.


그중 최고는 내 생일이었는데, 한동안 매년 내 생일이면 아버지는 퇴근길에 딸기를 한 봉지씩 사 오셨다. 지금이야 사시사철 맛있는 딸기가 마트며 백화점에 지천이지만 80년 전후 음력 2월에 딸기는 거의 팔지도 않았고 팔아도 우리는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쌌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이셨는데 그 동네는 엄청난 부촌이라 딸기가 이른 봄에도 팔았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는 구경도 못 하는 딸기를 사다 주셨을 때 나는 으쓱해서 어깨가 천장을 뚫을 듯 거만해졌다. 어렸지만 아버지가 아주아주 큰맘 먹고 사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우리 딸 생일이라 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가족 모두 알았다. 어머니도 그때만큼은 오빠에게 먼저 주지 않으셨다. 이런 특별대우는 오빠도 동생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해주셨다. 말이 없고 무뚝뚝했지만 따뜻한 분이셨다.


그 당시엔 철저하게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어머니가 미웠지만,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그 시대에 옳다고 믿는 삶을 충실히 사셨을 뿐이다. 오히려 팍팍한 살림을 꾸려나가려 애쓰셨던 어머니를 가엽게 여길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아버지가 생일에 딸기를 사다 주셔서 좋아하게 됐는지, 내가 좋아해서 사다 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 내가 딸기를 좋아하는 건지, 딸기를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특별했던 기억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생일이면 퇴근길에 딸기 한 봉지 들고 오시던

지금은 고단한 삶의 여정을 마치고 내 마음속에서만 살고 계신

무뚝뚝한 아버지가 가슴 저리게 그립다.

나도 아버지의 ‘사우디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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