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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Aug 25. 2021

약속

초등학교 때까지 나는 뼈만 있을 만큼 말랐었다. 지나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쟤가 저렇게 말라서 클 수 있겠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매끼 그리고 중간중간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는데도 그렇게 말랐던 건 밥 먹고 숙제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쉴 새 없이 뛰어놀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가서 공부하느라 앉아만 있으니 1년 새에 10kg이 확 쪄버렸으니까 ㅋㅋㅋ


하루 종일 지칠 줄 모르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다방구나 고무줄, 얼음땡, 술래잡기 등을 하고 놀았다. 오빠가 있어서 오빠가 친구들하고 노는 데로 곧 잘 따라다녔다. 앉아서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도 했지만 대부분을 대문 밖에서 보냈다. 동네 초입에 파출소가 있고 그 앞에 광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넓은 마당'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차가 많지 않던 시대라 그 넓은 마당이 아이들의 주 놀이터였다(슬프게도 언젠가부터는 그곳이 다 주차장이 돼버렸다). 낮에 실컷 놀고도 성에 차지 않아 저녁을 먹고 나서 파출소 불빛이 비추는 '넓은 마당'에 또 나와서 각자 엄마 아빠가 억지로 데리고 들어갈 때까지 놀았다. 때로는 부모님들도 돗자리를 펴고 앉아 아이들 노는 것도 보고 이웃과 함께 군것질 거리를 싸와 밤마실을 즐겼다.


그런데 조금씩 자라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언제부턴가 같이 놀던 친구들이 정해진 시간만 되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피아노 학원, 어떤 아이는 주산 학원, 어떤 아이는 미술학원 각자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여유 있는 집 아이들은 과외 선생님이 집을 오시기도 했다. 항상 같이 놀던 나와 친한 J도 신나게 놀다가 피아노 레슨 시간이 되면 신데렐라처럼, 나에게 구두가 아닌 부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우리 동네 피아노 학원은 특이하게 쌀집과 같이 붙어 있었는데, 아저씨는 쌀집을 운영하고 아주머니는 안채에서 피아노 레슨을 했다. 갈 곳이 없던 나는 친구가 들어간 그 쌀집 앞에서 친구의 뒷모습을 더듬어 기억하며 부러움 반 서글픔 반 어깨에 짊어지고 한참을 석고 인형처럼 서 있었다. 친구가 띵땅띵땅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집도 오빠는 장남이라 그래도 주산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받아보고 했지만 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미술학원이며 무용학원이며 또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은 많은지 오죽하면 미술학원 대신 친구를 꼬셔서 쉬는 날 학교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러 갔었는데 내 형편없는 그림솜씨에 기분만 상했었다. 배우고 싶은 건 많고 잘하는 건 별로 없는 그냥 욕심만 많은 어린애였다.


같은 동네에 둘째 고모가 살았다. 한 동네라곤 하지만 고모는 우리 집과 비교가 안되게 부자였다. 그 집에 H라는 나보다 2살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생일이 빠르고 나는 아버지가 호적에 1년 늦게 올리는 바람에 학교를 같이 다녔다. 같은 동네에 살고 학년도 같으니 H와 나는 많은 걸 함께 하며 자랐다. 어느 날 고모가 얘기 중에 조금만 기다리면 H와 나를 같이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피아노 레슨 같은 건 꿈에도 생각 못하는데 부자 고모가 나도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겠다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는가. 그 후로부터 하루가 만년은 되는 듯, 고모 그림자만 보여도 목을 빼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마침내 고모집에 고급스러운 갈색의 최신형 피아노가 들어왔다. 검은색 피아노의 시대가 지고 자연스러운 나무의 갈색빛을 띤 피아노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내 눈에는 그 피아노가  집안을 다 차지한 듯 커 보였다. 웅장하고 빛났다. 이제 나와 H가 피아노 학원에 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H가 ㅇㅇㅇ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레슨을 받으러 다닌 지 한 참이 지나도 나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걸까? 하염없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건 고모의 빈 말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던 날, 고모에 대한 배신감과 가난한 우리 집에 대한 원망과 그걸 바라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까지 더해져, 마음속 쌓이고 쌓인 상심의 산이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작은 내가 땅으로 꺼져버릴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고모는 H가 피아노를 어떻게 배우고 얼마나 늘었는지 시시때때로 자랑했다. 


나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정말 까맣게 잊은 것일까. 잊었어도 나쁘다. 말이나 하지 말던지... 힘이 없는 아이는 왜 약속을 안 지키냐고 항변 한 번 못하고, 그 후로도 H가 누리는 많은 것들을 그저 지켜보며 부러움과 슬픔을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삼켜야 했다. 고모가 내 부모도 아니고, 아이와의 약속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사정은 어른들의 형편에 따라 아무런 설명 없이 얼마든지 무시되던 시대였으니까. 나도 이제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커버렸다. 그때의 고모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아이에게 절대 빈말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과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한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이 변할 수 있으며, 원하는 시기에 못해줄 수도 있음을 꼭 설명한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고모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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