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Parasite) 2
리즈의 부동산 인문학] 1권. 욕망의 집
흑과 백, 넘지 못할 선은 없다.
1편의 마지막에는 제목이 왜 기생충인가를 묻고 숙주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기생충의 생존 방식을 설명하며 끝냈다. 그렇다면 관객이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궁금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다 기생충 같은 존재들인가?
영화에서 기생충은 누구를 가리키는 상징이었을까? 감독은 친절하게도 이름으로 그 답을 알려준다. 기택, 기우, 기정, 충숙.
한국에서는 이름에 항렬자를 사용한다. 항렬자는 같은 씨족 안에서 상하의 차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동일한 세대의 자손에게 공유되는 이름자 하나를 뜻한다.
그러나 기택네 가족은 아버지와 자식들이 같은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다. 기태, 기우, 기정. 우연이었을까? 영화의 선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은 감독이 그랬을 리가 없다.
이것은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잔인한 표현 아닐까? 엄마 이름조차 '충(蟲)숙'이다. 감독은 기태의 가족을 기생충이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생충은 인간과는 다른 종이다. 침팬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될 수없듯 기생충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숙주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기우가 저택을 사서 아버지를 지하에서 나오게 해 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반지하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끝까지 현실 고증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
영화의 흑백판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흑과 백, 넘지 못할 선은 없다.
영화 포스터의 인물 눈을 왜 흑백 띠로 가려놓았을까 궁금했었다. 박 사장네 가족은 흰색, 기택네 가족은 흑색 선으로 구별된다.
흑과 백,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기택네 가족뿐이다. 박 사장은 그 선을 넘어오게 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영화는 선을 얘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빛도 선만큼 잘 다루고 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존재감이 뚜렷하다.
한 줄기 햇살조차 허락되지 않는 지하 벙커와 대비되어 탁 트인 통유리 너머로 초록빛 정원이 펼쳐진 박 사장의 저택 1층은 빛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하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 빛은 사라지고.
박 사장이 가족들과 캠핑을 가고 집을 비운 날,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 초인종을 누르며 숨겨진 또 하나의 공간이 드러난다.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의 저택으로 침투하는 과정은 신분 상승을 위한 꿈의 실현이었다. 남의 집이기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의 공간을 차지했다. 흑이 백의 선을 넘은 것이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와 함께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백의 공간에서 그들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숙주의 공간에서는 숨어야만 살 수 있는 흑의 존재들이다.
박사장이 휴가 간다ㅡ비가 온다ㅡ빛이 사라진다
박사장 가족이 여행 중 갑자기 돌아오고 우여곡절 끝에 박 사장네 집에서 탈출한 기택, 기우, 기정은 폭우 속에서 터널, 내리막 계단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그들이 내려가는 끝없는 계단은 빛을 잃은 추락
어느 계단에서 기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이 세차게 자신의 다리를 때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말없이 쳐다본다.
그래도 세 사람은 간신히 집에 도착하지만, 홍수가 나서 동네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반지하 집까지 침수된 상태였다.
누전 때문에 창틀에 전기가 흘러 창문도 닫지 못해 물은 속절없이 계속 흘러 들어오고, 결국 세 사람은 깜빡이는 형광등 불에 의지해서 급하게 집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다.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 속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택은 아내 충숙의 해머 던지기 대회 은메달을, 기정은 구정물이 역류해 솟구치는 변기를 뚜껑으로 닫아서 막은 다음 화장실 천장에 숨겨둔 담배와 비상금을 챙긴다. 이 와중에 기우는 민혁이 준 수석이 물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것을 보더니 수석을 챙겨서 나온다.
비가 와도 평온한 일상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박사장네와 삶의 터전 자체가 잠겨버리는 기택네.
이 두 공간 사이의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웬만해서는 좁혀질 수 없는 초양극화의 공간적 사례다.
조금 더 들여다보기
영화 <기생충>에서 '빛'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일조권'과 '조망권'이라는 권리이다.
저택을 중심으로 이 권리들이 어떻게 계급의 수직 구조를 고착화하는지 인문학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조망권: 풍경을 독점하는 권리
인문학적으로 조망권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박 사장 저택의 1층 거실은 건축가 남궁현자가 '예술'을 위해 설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빛은 '조망권'의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프레임화 된 자연: 1층의 거대한 통창은 외부 세계를 하나의 정제된 그림으로 만든다. 여기서 조망권은 단순히 밖을 보는 권리를 넘어, '불쾌한 현실을 배제하고 아름다운 빛만을 볼 권리'를 의미한다.
박 사장네 사람들은 이 창을 통해 햇살 가득한 정원을 소유하며, 담장 너머의 가난과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다.
박 사장 가족에게 빛은 풍경을 완성하는 장식품이며, 그들은 이 빛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매일 재확인한다.
반지하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은 조망권이 거세된, 최소한의 '일조권'에 대한 갈구다.
조망의 부재: 반지하의 창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지나가는 행인의 발이나 노상 방뇨하는 취객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조망권이 박탈된 인간이 겪는 시각적 모멸감을 상징한다.
빛의 불평등: 1층에서 햇볕이 '향유'의 대상이라면, 반지하에서 햇볕은 빨래를 말리고 곰팡이를 억제하기 위한 '생존 자원'이다. 일조권이 지상층보다 현격히 낮은 이곳에서, 기택의 가족은 빛조차도 계급에 따라 차등 분배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지하의 암흑: 권리를 잊어버린 자의 공간
집안 깊숙이 숨겨진 더 깊은 지하의 어둠이 있었다. 지하 비밀 벙커는 일조권과 조망권이 아예 '0'인 공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인간 실격의 공간이다.
인간 실격의 공간: 법적으로 일조권과 조망권이 보장되지 않는 공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근세가 머무는 지하는 빛이 전혀 들지 않기에, 그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완전히 지워진 '사회적 유령'이 된다.
그래서 햇빛(자연광)을 볼 수 없는 근세는 1층의 전등(인공광)에 집착한다. 일조권을 잃은 자가 조망권을 가진 자의 인공적인 빛을 숭배하게 되는 이 비극적 역설은, 자본이 생명의 근원인 빛마저 통제하고 있음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1층은 아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조망권을 가졌지만, 아래층은 1층의 빛(권력)을 끊임없이 살펴야 살 수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1층의 조망권은 '운치'가 되지만 반지하의 실낱같은 일조권은 사라지고 빛을 제공하던 공간은 '침수'로 잠긴다. 날씨는 모든 계층에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날씨를 받아내는 공간에 따라 결과는 생과 사로 갈리기도 한다.
알다시피 빛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자연권'이다. 그러나 <기생충> 속 1층은 자본을 통해 이 빛을 '조망권'이라는 사치재로 격상시켜 누리고, 아래층은 그 부스러기 같은 '일조권'마저 폭우와 담장에 가로막혀 상실된다.
영화 포스터에서 눈을 가린 흑백선은 빛을 향유하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을 구별하는 선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빛은 잔인한 선이다.
초고층 빌딩 아래 빛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물어야 한다. 누가 그들에게 빛을 독점할 권리를 주었는지.
부동산 인문학자 닥터리즈입니다. 세상의 공간들을 닥터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소리 내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