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층. 선택장애가 생겨버린 나.
선택. 그리고 결정.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는가?
이를테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의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우리의 하루 일상을 예를 들어보자.
아침에 맞춰놓은 알람을 듣고 곧바로 일어날지, 10분만 더 자고 일어날 건지.
출근을 하면서 어떤 노래를 들을 건지, 혹은 어떤 영상을 볼 건지.
배고플 때 간식을 먹을 건지, 점심시간을 기다릴 건지.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하고 잠은 몇 시에 잠들 건지.
위의 예시는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에서의 선택을 시간에 따라 나열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위의 예시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선택 속에서 수없이 결정을 내리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면 그 결정은 어떻게 내리는가?
바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머릿속에 새겨진 데이터에 의해 선택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안 좋았던 결정들은 과거 데이터를 보완해서 더 좋은 결정을 내리도록 세팅한다.
반면에 좋았던 결정들에 대해서는 같은 선택 상황이 오면 그 결정을 하도록 세팅한다.
나 또한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후회도 했지만 좋은 결정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 결정에 대한 결정권자는 물론 나겠지만,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 오는 충격은 막심하다.
선택을 내린 건 나이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나였다. 그렇게 적절한 충격을 버티고 보완하며 살아오던 나였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과거의 나는 항상 어떤 선택이 와도 자신감을 갖고 결정을 내렸다. 덕분에 결정을 내리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만큼 어떠한 일이 닥쳐도 '일단 해봐.'라는 식으로 시작을 했더랬다. 물론 선택에 대한 책임이 커지면 커질수록 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비례해서 커졌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배우자가 될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내린 결론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모든 걸 알지 못했나 보다. 아니, 오히려 속일 수 있으면 속임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미 모든 신뢰가 무너져 버린 관계이니 말이다.
그렇게.. 확신을 갖고 내렸던 결정들이 그 사건으로 인해 모두 무너졌다.
내 결정력이 집을 가출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현재의 나는 어떤 큰일을 결정하기 전에, 항상 누군가의 조언부터 구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를 선택할 상황이 오면, 바로 확신을 갖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먼저 생각을 하고 자연스레 주위로 머리를 돌린다. 그 뒤, 나는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에게 조언을 듣는다. 그들의 생각을 정리한 후 그제야 겨우 결정을 내린다. 물론, 조언을 구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선택에 대한 결정을 못해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맡기는 이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과거에 그릇된 결정 하나가 이런 후폭풍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상담을 통해서 들은 내용은 다행히 이런 문제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선택에 대한 결정력이 줄어들면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다.
내가 내 몸을 움직이는 주체인데, 선택장애가 오게 되니 영혼과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아니, 머리랑 몸이 따로 논다고 해야 하나...? 그만큼 내가 나를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결정은 이런 나와의 대화를 거친 후,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을 한 이유가 뭐야? 왜 타당하지? 다른 선택을 하면 좋지 않아?' 등의 수많은 의심들이다.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안 하며 사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 잘못된 선택 하나가 정말 크게 영향을 주면 트라우마로 남겠다 생각했다.
저번주에는 오랜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라면 황금 같은 주말도 기꺼이 시간을 낼 수 있다.
동기 세 명과 저녁을 먹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좋아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적절한 취기가 올랐을 때, 동기 한 명이 운을 떼었다. 현재 내가 겪은 그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등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동기들에게 모든 설명을 했다. 그러니 동기 두 명이 힘들겠다며 위로를 보내주었다. 그때,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만 있던 동기 A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동기 A : 야, 너네들 그런 응원도 좋긴 한데 우린 대현이가 받은 고통이나 얼마나 힘든지 절대 몰라. 나는 그걸 이해 못 해주는 게 너무 안타깝고.. 그래서 나는 쟤 얼굴을 못 보겠어.
동기 A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였다. (물론 취하진 않았다.) 동기 A는 내게 생긴 그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내가 먼저 연락을 했던 친구다. 사건이 터지기 몇 주전, 이미 1년 전에 결혼을 한 동기 A에게 '그'의 행동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조언도 받았더랬다.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동기 A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동기 A는 수화기 너머로 한숨만 쉬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중에서 가장 힘겹게 들렸다.
그간 동기들의 결혼식에서도 동기 A를 많이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동기 A는 내 얼굴을 잘 못 쳐다봤다.
아마.. 사건 전에 동기 A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한 죄책감을 더러 갖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이유 때문이란 걸 이번에 술자리를 하며 눈치챘다.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겨 안 먹던 술도 어느새 한 잔씩하고 있었다. 어느새 술잔을 비우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기 A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 야 내 얼굴 잘 봐. 네가 말한 대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아무도 내 감정을 이해할 순 없어. 그래도 너네들이 지금 이곳에 나랑 같이 있잖아. 그냥 그게 좋은 거야.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현재를 즐겨.
그제야 동기 A는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마주 보며 대화도 하고 웃음 짓기도 했다.
나는 저 말을 내뱉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동기 A가 나에게 갖고 있는 모든 죄책감이 다 풀렸기를.'
결정. 선택을 정하는 행동.
앞으로는 인생에 대한 결정을 결코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고 행하는 나 자신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을 다짐한 것 같다.
정말 어려운 결정 앞에서는 이미 그 결정을 한 사람들에 대한 지혜와 식견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결정에 일말의 후회 없이 나아가 보련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우선은 지식을 쌓는 게 제일 최우선이다. 다행인 것은 혼자가 되고 나서부턴 남는 게 시간이다. 그리고 성장의 계절이 돌아왔다. 겨울.
요새 도서관이든 카페든 대중교통이든, 어디든 앉을 곳만 있으면 들고 다니는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과거 위인들의 식견이나 지혜를 얻어 내 가치와 자신감을 다시 찾는다면, 무릇 시간이 지나 과거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내가 돼있겠지.
그러면... 집 나간 결정력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이미 돌아왔을 수도..
길을 잃었더라도 언젠가 그렇듯 다시 돌아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