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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음식일기 11화

내돈내산, 셀프 스시

by 고작가

미식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음식은 맛있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진리 이상의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 배부르게 쌀밥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에 자랐던 어르신들에겐 복에 겨운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처럼 원초적인 인간의 욕구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미식가와 대식가의 중간정도라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가리는 음식 없이 적당한 양을 먹는 편이지만, 입에 딱 맞는 음식을 만나면 3~4인분 정도를 먹어야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게를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연히 들어간 고깃집의 음식이 너무 입에 맞아서 추가로 삼겹살 2인분, 목살 2인분, 소주 2병, 맥주 2병을 먹고 된장찌개에 밥 한 공기를 먹는 걸 본 친구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고기 먹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끝까지 내 옆에서 고기를 구워 주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시에서 그 친구를 만나면 그때 그날 밤 이야기를 나누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곤 하지만, 그날 밤의 고기맛은 나지 않았다. “영수야, 고맙다. 이제 나도 너한테 고기 사줄 정도는 버니까,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서귀포 넘어와라. 내가 고기 실컷 사주마.”

육지에서 일식집 사장으로 15년을 살았다. 회와 탕, 구이와 튀김, 생선과 해물로 만든 음식을 긴 시간 접하면서 정작 입으로 들어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서일까, 먹고 싶다는 욕구는 오히려 줄어들었던 때였다. 하지만, 그런 일식 중에서도 가끔씩 생각나는 음식이 스시였다. 새콤달콤하게 잘 비벼진 초밥 위에 와사비를 발라 적당히 숙성된 도톰한 생선살을 올려 와사비 간장에 찍어먹는 간단한 음식. 계절마다 올라오는 제철 생선 맛에 따라 식감과 향, 맛이 달라지는 스시는 일식집을 폐업한 후에도 한 번씩 먹고 싶었다.

내 가게에서 스시를 먹을 땐 맛있는 부위만 골라서 1인분 정도만 먹어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먹고 싶어 돈 주고 스시를 사 먹으려고 하니 그 돈이 그렇게 아까웠다. 더욱이 회전초밥 집에서 2 pcs씩 담아진 조그만 접시가 쌓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원가 계산이 바로바로 돼서인지 편하게 배불리 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트에서 파는 초밥을 먹자니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주에 내려온 그해 겨울부터 나는 스시 만큼은 직접 만들어 먹고 있다.


간혹 지인들이 초밥 맛있게 만드는 비법이 있냐고 묻곤 한다. 모든 음식이 그러하듯 원재료가 신선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거기에 스시의 특성상 생선살은 많이 상대적으로 밥 양은 적게 쥔다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스시에서 밥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스시의 간을 결정하는 건 밥이다.

스시의 밥은 흰쌀밥으로 일밥 밥보다는 되게 해서 초대리를 비볐을 때 양념이 잘 벨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밥을 지을 때 다시마를 함께 넣고 미림을 약간 넣어주는 것도 밥맛을 끌어올린다.


둘째, 초대리(소스)를 만드는 방법은 설탕 3, 식초 2, 소금 1을 비율대로 냄비에 넣고 중불로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인다. 이때 설탕과 소금이 다 녹을 때까지만 끓이는 것이므로 국 끓이듯이 부글부글 끓이면 초성분이 다 날아간다. 재료가 녹을 정도로 데워준다는 느낌으로 끓여보자. 불을 끈 후에 레몬즙을 짜서 넣으면 풍미가 더욱 좋아진다.

넓은 볼에 뜨거운 밥을 펼쳐서 초대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흠뻑 뿌리고 잘 비벼준다. 밥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여러 번 비벼주는 것이 좋다. 네타(밥 위에 올리는 주재료를 일컫는 말)를 올렸을 때 밥이 부서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식힌 다음에 조리하는 것이 좋다. 이때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 물기 있는 면보를 밥 위에 덮어두자.


이제 주재료인 생선살을 준비해 보자. 물론 고급 어종으로 스시를 만들면 더욱 좋겠지만, 가성비를 생각해서 나는 제철 생선을 주로 쓰는 편이다.

우선 광어. 대한민국 초밥 집에서 가장 많이 쓰는 생선으로 자연산도 있지만, 대부분 양식을 사용하므로 쉽게 구할 수 있고 맛 또한 균일하다. 나는 주로 봄, 가을에 쓴다. 수산시장에서 오로시(살과 뼈를 분리하고 껍질을 벗긴 상태)를 해서 생선살을 구입한다. 사시미 전용칼이 있다면 좋지만, 일반 한식 칼로도 재단이 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툼하면 맛이 좋다.

식당에서 먹을 때 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칼을 45°로 눕혀 비스듬히 네타를 떠보자. 그래도 칼이 무섭다면 왼손에 목장갑을 끼고 칼질을 해도 무방하다. 이때, 활어 상태에서 해동지에 감싼 뒤 냉장고에서 4시간 정도 숙성 시킨 뒤 네타를 뜨면 식감과 기름진 맛이 배가된다.

네타까지 준비되었다면 초밥을 손에 넣고 쥐어야 한다. 만화책이나 방송에서 초밥 장인들이 초밥 알 수를 세어가며 쥐는 초밥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하는 일이고, 우리는 셀프 스시 초보자 들이다. 그냥 느낌대로 밥알을 쥐면 된다. 이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작게 쥔다고 생각하고 밥알을 쥐어보면 얼추 맛있는 초밥이 쥐어진다. 너무 단단히 밥알을 쥐지 말고, 밥알이 숨 쉴 수 있게 조금은 부드럽게 쥐어보자. 밥알을 쥐다 보면 손바닥에 자주 붙게 될 것이다. 맨손으로 쥔다면 옆에 레몬물을 두고 손바닥에 묻혀가며 쥐면 도움이 된다. 네타에 찍는 와사비는 취향 껏.


처음엔 손에 익지 않아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만들다 보면 스시만큼 단순하고 있어 보이는 음식을 찾기 힘들다. 가장 대중적인 광어뿐 아니라, 봄에는 도다리, 여름에는 자리 나 병어, 가을에는 전어, 겨울에는 방어나 부시리 같은 제철 생선으로 동일하게 조리할 수 있다.

흔히들 스시를 시원한 음식으로 분류하지만, 스시를 먹는 개인적인 취향은 추운 겨울날, 정종을 따뜻하게 데워서 스시와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돈을 받고 손님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스시가 이곳 서귀포에선 내가 진심으로 먹고 싶어서 정성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되었다. 가까운 지인들은 내가 만든 스시 맛을 본 후에 초밥집을 차려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일식집 고 사장보다 노가다 고 실장이 훨씬 행복하다고. 스시는 이제 돈으로 가 아닌 맛으로 행복을 주는 고마운 음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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