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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가 Oct 08. 2023

Back to the Army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성이 꾸는 악몽 중 한 가지는 군대를 다시 가게 되는 꿈일 것이다.

제대한 지 20년이 넘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꿈에도 잘 나오지 않는 군대를 

최근 일 때문에 열흘간 출근하게 되었다.  

뉴스에서만 보았던 강정항 해군기지에서 페인트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 

      

강정항 주 출입구 정면의 담벼락 보수작업 구간은 총 1.5km. 

부대 안쪽면의 페인트 작업구간도 같은 길이였다. 

담벼락 높이는 3~4m로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긴 구간이라 작업자 6명이 두 조로 나눠 열흘간 작업했다.

일반 건물의 외부 페인트 공정은 고압세척기로 물청소를 한 다음 고르지 못한 면을 갈아내고 

빠다 작업을 해서 면을 고르게 한 후 페인트로 두 번 칠을 해주면 된다. 

긴 담벼락이다 보니 물세척은 생략하고, 핸드 그라인더로 면을 고르게 정리하고, 

핸디코트로 벽면을 고르게 메웠다. 

작업자 3명씩 구간을 나누어 이틀 동안 그라인더를 돌려도 끝이 나지 않는 긴 구간이었다. 

오전 내 작업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면 손이 떨려서 젓가락질이 제대로 안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삼일째 작업을 하니 어느덧 끝이 보였다. 

핸디코트로 간 면을 고르게 메워주는 데도 하루가 넘게 걸렸다.      


내가 군생활 할 때는 이런 부대 안 페인트 작업이나 영내 작업은 부대원들이 달려들어 했는데

요즘은 부대원들이 주 임무인 경계근무를 서고, 민간인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와 공사를 진행했다. 

해군 부대여서 그런지 일반 사병들도 일과시간 이후에는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자유롭게 운동도 하고, 

여가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예전 90년대 군생활을 한 나로서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우리 때는 복무기간도 26개월이었고, 운동은 전투화를 신고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축구가 다였는데

요즈음은 군복무 18개월에 일반 공무원들처럼 일과시간 이후에는 여가생활이 가능한 듯 보였다. 

우리 때와는 다르게 시원해 보이는 군복에 편한 전투화를 신고 경계근무를 나가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그때는 지겹고 힘든 시간이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20대 때의 젊음이 얼마나 좋았었는지 

몸서리쳐지게 그때가 그리워진다. 


20여 년이 지나 중년이 되어 다시 보게 된 부대의 모습은 그때의 내 젊은 시절을 회상하게 해 주었다. 

다시는 먹어보지 못할 부대 내 식당밥(일명 짬밥)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보안을 이유로 부대 밖에서 점심식사를 해야 했고, 핸드폰도 부대 출입 시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늘 한점 없는 담벼락 밑에서 페인트칠을 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추억팔이보다는 

얼른 작업을 끝내고 부대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역시 군대란 곳이 일단 들어가면 나오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일주일 넘게 페인트 칠을 하고 있자니 어릴 적 읽은 ‘톰소여의 모험’에서 톰이 울타리 페인트 칠을 하면서 

일이 아닌 놀이로 동네 아이들을 설득해서 오히려 물건을 받고 페인트 칠을 시키는 일화가 생각났다. 

조금씩 하면 힘들다기보다는 재미에 가까운 페인트 칠인데, 돈 받고 길게 하려니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 

일반 로울러로 칠하지 않고, 본타일 후끼로 양각을 잡아놓고, 에어리스로 칠을 뿌리다 보니 

일반 칠 작업보다는 여러 가지 장비와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열흘동안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 

1.5km의 초라한 담벼락은 미술관의 담벼락처럼 멋있어졌고, 

사장님을 포함한 6명의 작업자들은 황색인종보다는 흑인에 가까운 얼굴이 되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서귀포에서의 또 다른 업적을 남긴 것 같아 뿌듯했다. 

이제는 서귀포 바다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강정항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저기 보이는 강정항 담을 내가 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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