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맛 ver.2025

by 레이크스트림





가을이라고 하기엔 날이 마이 춥다. 어느새 아침 최저 기온은 영하를 찍었고, 한낮에도 15도를 넘기기 어렵다. 여기에 바람까지 불면... 롱패딩을 꺼내야 한다. 남자의 생명은 헤어스타일이라는데, 아몰랑 그건 모르겠고 추울 땐 패딩 후드를 뒤집어쓰는 게 짱이지. 동장군이 오고 있다. Winter is com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나무의 계절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파트 입구 당단풍나무는 여전히 시뻘건 자태를 뽐내고 있고, 노랑 주홍빛으로 환복한 왕벚나무의 잎도 절반이나 남아 있으니, 가을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짐 싸고 출발하는 거다.



등산 준비물



오늘의 목적지는 월악산이다. 일요일 오전에 회사 일이 있어 가까운 청계산은 안 되겠냐고 물었건만, 등산홀릭 아드님은 곧 죽어도 월악산 영봉을 찍어야 한다며 꼬장(?)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의 기호에 맞게 일정을 짰다. 금요일 퇴근 후 충주로 출발, 본가에서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등산하고 오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강행군이다. 피곤에 절어버릴 게 명약관화이므로... 최단 코스인 '신륵사 코스'를 택했다.



TMI

월악산 등반 코스는 보덕암 코스, 덕주사 코스, 신륵사 코스가 있다. 하봉-중봉을 거쳐 영봉에 오르는 보덕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코스지만(경치가 끝내준단다), 난도가 가장 높다는 말에... 우리는 쫄보...



6시에 출발하기로 해놓고 날이 춥다는 핑계로 한 시간을 더 잤다. 현재 영하 1도. 해가 떠야 그나마 온도가 오를 텐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나름대로 중무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도로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아들 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길래 해 뜨면 다 사라질 거라고 얘기하면서도 나 역시 오늘 제대로 된 경치를 볼 수 있을까 소심해진다.





08:40

신륵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자리가 널널하다. 차 문을 열고 나왔더니... 예상대로 겁나 춥다. 귀마개에 비니모자, 장갑을 착용하고, 핫팩까지 하나 터트려 가슴팍에 넣었다. 양손엔 등산스틱을 쥐고 본격적인 등산길에 오른다. 아참, 기념사진도 하나 찍어야지.


저 멀리 보이는 바위산.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다. 우 씨... 그냥 보기만 해도 겁나 먼데... 저기를 두 시간 만에 완주했다고 말한 사람 누구냐. 칭찬해 주겠다. 완만한 오솔길을 지나자마자 돌과 통나무로 마감된 오르막이 이어진다. '최단 코스=높은 경사도'라는 공식을 망각했던 자신을 한탄하기엔 이미 늦었다. 숨을 헐떡이며 다리에 힘을 빡 준다.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가...



덥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이게 뭔가. 땀이 흐른다. 장착된 아이템을 하나씩 어젖힌다. 귀마개, 바람막이, 니트... 결국 반팔이다. 연신 수건으로 이마를 훔친다. 오르막이 심한 데다 길도 좁아 뒤따르는 아이에게 스틱으로 땅을 짚으며 외친다. "여기 밟고, 여기 잡고, 여기 밟고 올라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곧잘 따라오는 걸 보니 참 대견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러고 보니 월악산은 두 번째다. 녀석이 여섯 살 때 덕주사 코스로 마애불에 다녀왔었다.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준 덕분에 내 무릎도 아작이 났었지. (ㅠㅠ) 그 얘기를 했더니 기억이 전혀 안 난단다. 이노무좌슥, 기억 못 해도 좋으니 오늘은 잘 걸어라잉!!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을 지난다. 완만하기도 하고 가파르기도 하다. 중간중간 쉬는 공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벤치 하나 없다. 바위 계단에 앉아 물을 보충하고 걷고 또 걷는다. 새벽에 출발해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누가 봐도 초보 등산러 부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들, 대단하다! 파이팅!"


"거의 다 왔어요! 힘내세요!" ... (내려올 때 보니 이건 뻥이었다.)



북한산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월악산의 초코파이 정(情)인가.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응원에 발등 무게가 500g 정도 줄어드는 느낌이다.



또 부지런히 걸었더니 드디어 신륵사 삼거리다. 블로그에서 보았던 철제 계단 옆으로 뚜껑 달린 통로(낙석 방지를 위함)가 나오는데... 뷰가 아주 그냥... 끝내준다. 동시에 두 다리도 후들거린다. 말해 뭐 해.



산 너머 산 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악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 거대한 바위산을 빙 둘러 철제 계단이 이어진다. 옆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고, 뒤를 보면 올라온 계단 때문에 더 무섭다. 이것을 설치한 이들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한 걸음에 심호흡 한 번이다. 아무튼 후달린다. 아들아, 너는 괜찮은 거니?



후들후들



11:10 두 발인지 네 발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왔다. 드디어 영봉이다.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오르니 사방팔방이 탁 트였다. 하늘빛, 산빛, 물빛의 삼위일체. 요리 보고 저리 봐도 눈이 즐겁다. 어느새 뻥 뚫린 가슴이 새파란 산소로 가득 찬다. 좋다. 너무 좋다. 배운 자로서 산 정상에서 느낀 기분을 영어로 표현해 보겠다.



산세이셔널(San-sational)!!!



영봉 뷰(feat. 충주호)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찍고 바로 옆 봉우리에 마련된 휴게 장소에서 점심을 차린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다. 찬물만 부어도 끓어오르는 전투식량... 라면밥! 신문물이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스팀에 주변 등산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와, 저거 봐봐."


"완전 신문물이네."


"(다가와서) 이건 뭐예요?"


"아들, 엄청 맛있겠다."


아 부크럼......



신문물 흡입중



지표면에서 먹어도 맛있는 라면밥을 해발 1,097m 산 정상에서 먹으면? 겁나 맛있다.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하산을 위해 초코바 하나와 물 한 병을 남기고 입으로 싹싹 털어 넣는다. 월악아! 반가웠어! 또 올진 모르겠지만(?) 잘 있어! 이제 다시 후들거리며 내려갈 일만 남았다. 아들아, 난간 꽉 잡아. 놓치면 알지? 가는겨. 천국으로. 올라왔던 길을 생각하니 아비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 것이다. 자, 이제 하산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럴 수가. 고소공포증이 말끔히 치유되었다. 오금 저림과 후달림으로 가득했던 하반신이 환골탈태를 한 듯 멀쩡하다. 똑같은 계단인데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다르다. 이건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다. 난간에 의지하지 않고도 폴짝폴짝(?) 움직이는 자신이 놀라울 뿐... 아이가 신이 나서 외친다.



"아빠! 나 저번에 월악산 후기 찾아봤는데 거기서 그랬어. 내려올 때 고소공포증이 사라졌다고.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네! 완전 신기해!"



신이 난 부자가 리듬을 타며 산을 내려온다. 여유롭게 난간에 기대 사진도 찍고, 올라오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받았던 것처럼 먼저 인사를 건네 본다.



"안녕하세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파이팅!"



하산의 고통...



14:00 하산 종료. 거의 다 내려올 때쯤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대던 아이는 아니나 다를까 차에 타자마자 잠들어 버렸고,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 대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씻자마자... 떡실신했다. 잠결에 아이가 엄마에게 조잘대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월악산 엄청 무서웠는데, 내려올 땐 하나도 안 무서웠어. 높이 올라가봐서 그랬나봐."



그래. 그거면 되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그것. 참 좋은 여행이었다.



씨익.



산세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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