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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3-선전포고

선전포고

<선전포고>

반장과 부반장이 하는 일중 가장 어려운 건 교실 조용히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 중이나 방과 후 각종 잔심부름을 해야 했다. 중간 기말고사 후 남아서 시험지를 채점한다거나 체력장 기록표 같은 서류를 정리한다거나 체육시간이나 조회 시간에 줄을 세우는 것도 임원들의 몫이었다. 3학년이 되니 원서 정리니 전체 환경 미화니 해서 미술 선생님 눈에 든 녀석과 나는 주말에까지 함께 학교에 불려 나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거 날을 생각하며 혼자 화를 삭였다. 반장이란 녀석은 내 보기에 그저 말을 적게 하고 조용한 남학생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아이들이 만만히 보고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지도 못해서 내 일만 많아지게 할 것 같은 녀석이었다. 정보망을 통해 슬쩍 알아보니 녀석은 작년에도 어느 반에서 한 학기 동안 반장을 했었는데 아주 점잖고 조용해서 은근히 좋아했던 여학생들이 많았다고 했다. 

‘흠, 샌님과 라...... 뭐 무능력한 것 빼면 일단 해가 될 것은 없겠군.’

나는 일단 녀석 때문에 크게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라 안심했다. 그런 녀석들은 얌전히 제 공부나 하고 회의나 잘 진행하면 될 것이었다. 여학생들이 좋아했다니 여학생들에게 폭력을 쓴다거나 찌질이 같은 행동도 할 리가 만무했다. 임원을 했는데도 그렇게 그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것을 보면 존재감이 별로 없고 성적이 좋아 반장이 되었을 것이었다. 내 일은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여학생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뺀질이 과도 아니고 여자들 무시하는 불한당 과도 아니고 공부 잘한다고 잘난 체하는 재수 과가 아닌 게 어디냐... 나는 진심으로 그 한 가지를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고 서서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해 오던 대로 1년만 더 하면 되는 거야. 차라리 잘 된 거야. 하긴 마지막에 임원이 못 되는 것도 좀 그렇지. 2년 간 대중에게 미움을 샀다는 거니까. 그것보단 잘 된 일이야...’

이렇게 부지런히 내 마음을 잡는데 온 힘을 집중했다. 3월 가장 큰 행사는 뭐니 뭐니 해도 환경 미화였다. 말끔히 교실 안팎을 청소하는 것은 물론 각 반마다 주제가 되는 색을 정해서 시간표와 복도의 패널을 다양한 주제로 꾸미는 것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직접 했다. 녀석과 나도 우리가 처음 맡은 일을 위해 매일 방과 후 학급 임원들과 모여 회의를 거듭하며 일을 해 나갔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을까? 나는 녀석이 미술 선생님께 신임받는 인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승부욕은 약한데 단체상엔 이상하게 발동하는 나의 승부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녀석에 대한 일체의 껄끄러움을 해제시켰다. 나는 아주 잠깐 동안 심지어 녀석에게 고마워하기로 했다. ‘음하하. 샌님 반장도 써먹을 때가 있군.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반장이란 놈 덕을 다 보겠네.’ 

녀석은 거의 말이 없이 일을 했고 어쩌다 말을 해도 조용조용해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흡족한 마음으로 환경 미화를 끝내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를 빠져나왔다. 뒤에는 남학생 무리들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반장 녀석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야 부반장!”

일 끝내고 말 섞을 일이 없던 터라 약간 의아스러웠지만 일단 대꾸를 했다.

“왜?”

“너 내일은 콧수염 면도 좀 하고 등교해라!”

‘!!! 뭐래? 저거? 얌전하게 생겼는데 미쳤나?!! 어디 감히 나한테! 저거 실은 여학생 한 테 막말하고 그러는 까진 놈이었어?’

내가 다른 여학생보다 코 밑 솜털이 진하기는 했지만 그걸 놀림감으로 사용한 남학생은 없었다. 더구나 얌전할 거라 생각했던 녀석에게서 튀어나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도발이었다. 나는 그런 농담이 충분히 모욕적일 수 있는 여. 학. 생. 이 아닌가! 녀석을 ‘점잖다’ 고 보고한 나의 소식통은 도대체 기준이 뭐였을까? 학교에서 나에게 공식적인 일로 말을 거는 것 외에 사적인 일로 말을 걸 수 있는 남학생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나의 소꿉놀이 친구들 한 둘과 2학년에 친했던 한 둘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그들도 나를 놀리는 말이나 내 신체에 관한 일절의 농담은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못했나? 아무튼 나는 녀석과는 그런 농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도 않지 않은가! 환경미화 때 잠깐 가졌던 녀석에 대한 긴장 해제를 긴급 재무장 해야 했다. 허나 급한 상황부터 태연하게 넘기고 나중에 걱정하는 나의 성격상 녀석의 말이 내게 얼마큼 분노를 일으키는 것인지, 미친 녀석이 아닐지 미처 가늠할 새도 없이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했다.

“아주 좋은 면도기 하나 사 주면 물론!” 

“하하하.”

녀석은 뭘 잘했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너무도 황당하여 기도 안 찼다. 집에 와서 놈의 발칙함을 서서히 곱씹어보았다. 

‘뭐야, 저거! 정신 나간 거 아냐? 저거 작년에 몇 반이었지? 이름도 모르던 게 나와서는 어디다 감히!!!!!’

전교생 육백 명으로 시작한 아담한 우리 학교는 가족 같은 분위기여서 서로 이름도 모르기는 어려웠다. 지금이야 한 학급이 서른 명 남짓이지만 우리는 그 두 배였어도 아직 우리 학년 밖에 없는 학교였기 때문에 교장 교감 선생님도 웬만한 아이들 이름은 다 아셨고 선생님들은 물론 이었다. 게다가 학급의 대표들은 다른 반 선도 부원까지도 꽤 친했으니 임원들끼리는 서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헌데 녀석은 임원을 하면서도 그 이름이 딱히 알려지지 않아 나도 3학년 같은 반이 돼서야 알았다. 녀석에 비하면 나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터였다. 전교 일등을 하는 것도 아닌데 운이 좋게도 학교에 스펙을 쌓아주는 외부 상을 더러 타와선지 선생님들께 아낌을 받았고 새로운 선생님께서 부임하시기라도 하면 교감 선생님께서 그 선생님께 나를 소개하시는 황송한 일도 있어서 나는 전 학년 선생님들과 친분이 있었다. 교무실에 가면 선생님들께서 여기저기서 부르셔서 참고서 등을 주셨고 심부름이며 여러 가지 일도 시키셨다. 그런 내게 녀석의 이 무례한 등장은 한 마디로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 였다. 하지만 녀석의 그 겁대가리 없는 도발은 내 뇌리에서 곧 사라졌다. 내가 그런 변방의 한 무식자의 가련한 객기쯤을 받아주지 못할 좁은 아량은 아니라고 그날의 사건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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