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탐>
중3. 처음 반을 배정받고서 교실에 들어가니 입시라는 싸늘한 긴장감이 벌써부터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으-. 올 해는 진짜 임원 하지 말아야지. 공부만 해야지.’
나름대로 굳게 결심하고 기도를 했다. 새 학년 첫 주에 있을 반장 선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권을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다. 8년 임원 생활로 익혀진 감각으로 주위를 한 번 휙 돌아보니 전교에서도 소문난 장난꾸러기들이 드글대는 한편 임원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반에서 임원 했다간 공부고 뭐고 없을 게 뻔했고 임원으로 뽑힐 확률이 컸다. 요즘과는 달리 우리는 선거 운동이란 게 없었고 후보는 지원자가 아닌 성적순으로 임원이 되는 것은 명예롭 긴 했지만 책임도 무거웠다. 드디어 반장 선거 날.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반은 남자가 반장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남자 후보 중에서 반장을 뽑고 여자 후보 중에서 부반장을 뽑기로 했다. 일단 후보들은 무조건 앞에 나가서 소견 발표를 해야 했다. 거의 모든 후보들은 예의로 모두 ‘자신을 뽑지 말아 달라’ 고 한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앞에 나가서 말했다.
“여러분은 이미 제 폭력에 관해서 아실 만한 분들은 다 아십니다. 제가 임원이 되면 여러분은 고생합니다. 여러분은 여기 곱고 착한 여학생들 중에서 반장을 뽑을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대중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법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한 번 얼굴이 찍혀 있으면 대중은 별생각 없이 또 그 얼굴을 찍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나의 독재가 이제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하는 신설 학교인 모교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아직은 아늑하게 받아들여지는 민심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의 그런 예상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나는 압도적인 득표로 부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래, 표는 나오겠지. 하지만 내가 그것마저 떼를 쓴다면? 당선자가 안 하겠다고 버티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히 반장 부반장 선거를 따로 했기 때문에 표수로는 내가 반장보다 더 많이 나왔어도 나는 부반장일 뿐이었다. 반장은 평소에 잘 모르던 아이가 되었다. 전교생 고작 600백 명을 1 회생으로 시작하여 전교에 모르는 학생들이 거의 없건만 그 녀석은 잘 모르는 녀석이었다.
‘어, 저런 애도 우리 학교에 있었나? 아, 저 아이, 성경 공부 모임에서 보기는 했지?’
선거 후 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녀석도 작년 어느 반 임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별로 말이 없고 코가 크고 뭉툭한, 덩치가 큰, 뒤 쪽에 앉는 남학생이었다. 개표가 끝나자 또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다. 나는 표정을 심하게 굳히고 있었고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먼저 반장이 나갔다. 내 불만스러운 표정과는 사뭇 다르게 녀석은 덤덤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갔다.
“우선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그러냐? 난 별로!...’
“저는 경험도 많이 없는데 이렇게 당선이 되어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참에 경험을 더 쌓던지 그럼!’
이런 식으로 녀석의 당선 소감을 계속 맞받아치며 뒤틀린 심사를 달래려 는데 녀석의 다음 말에 정신이 휙 들었다.
“그런데 저보다 부반장이 표가 더 압도적이니……부반장에게 반장 자리를 양보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헉! 저 멍청이가 지금 무슨 소리야?’
재빨리 주위를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대중들의 표정이 녀석을 수긍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골이나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녀석의 소감 발표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일단 더 큰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튀어 나갔다.
“이의 있습니다. 여러분, 반장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장과 부반장을 각각 따로 투표했기 때문에 제가 반장으로서 표가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부반장으로서 다른 부반장 후보보다 더 표가 많은 것입니다. 선거는 결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끄덕이셨고 선생님의 판결로 나의 착한 대중들도 안정을 찾았다.
“그 말이 옳다. 선거를 따로 했으니 반장은 반장이고 부반장은 부반장이지.”
‘어, 이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피하려다가 내 당선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반장 당선자가 뭐라고 하고 나갔는지 알 것도 없었고 나는 이 부담을 벗을 궁리로 머리가 가득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려 내 본래의 의지를 피력했다.
“여러분, 저는 지난 이 년 동안 부반장을 했습니다. 이젠 다른 분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임하겠습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엎어져 울기를 시작으로 각종 시위를 했다. 일주일 동안이나 차려 경례 구령을 반장이 혼자 다 하게 하고 학기 초 반장 부반장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내 눈치를 살피시며 수업 후에도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인사를 받고 어색하게 나가셨다. 하지만 결국 나는 또 그 짐을 져야 했다. 학교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하시던 선생님께서 우리 담임이셨는데 모임에 열심히 출석하는 우리 둘이 임원이 된 것을 내심 기뻐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우리 반 반장 부반장으로 세우신 뜻이 있으실 거야. 우리 반이 주님께로 많이 돌아오도록 함께 노력하고 기도하자.”
그때껏 스스로를 십자군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나로선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될 말씀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