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주-2(1/2)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현을 다시 올려 보냈다. 먹고 바로 누우면 아침에 배 아프다고 말하면서 손에 소화제도 쥐어주었다. 핸드폰으로 12시 40분 정도 되었음을 확인했다. 20분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시우의 발에 바람에 이끌린 종잇조각이 걸렸다. 자세히 관찰했다. 일어서서 그 종잇조각의 출처를 찾았다. 분리수거 ‘종이’ 칸이었다. 설마, 하면서 비슷한 조각들을 찾기 위해 뒤적거렸다. 시발. 현의 글들이었다. 만날 때마다 저에게 이 훤히 드러낼 정도로 웃으면서 보여주던. 그 현의 공책.
종잇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가로등 빛이 희미해지자 핸드폰 불빛에 의존하여, 바람에 날린 것들과 아직 분리수거함에 있는 것들까지. 보이는 건 모두 주웠다. 조금이라도 흘리지 않게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남는 것들은 두 손 가득 안았다. 아까 저를 볼 때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현이 숨긴 것일까? 고개를 내저었다. 현이 거짓말 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한테는. 그래서도 안 되고. 고개를 들어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 층을 바라보았다. 9층이었다. 맞는지 아닌 지는 상관없었다. 혼자 울고 있을 현이 마음 쓰였다. 울지 않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더 가슴이 저렸다.
원래는 오후쯤 늦게 일어나지만, 전날 알람을 맞췄기에 오랜만에 오전에 일어났다. 낯선 알람 소리가 차갑지 않았다. 오전 7시 20분, 핸드폰을 켜 현의 학원을 검색하여 홈페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현이 학원 홈페이지에서 쉬는 시간, 강좌 정보 등등 다 있기에 매번 확인해야 하는 게 번거로운 일이라고 불평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시 50분 학원 시작, 8시 40분부터 9시까지 첫 쉬는 시간. 침대에 걸터앉아 책상 위의 새 마스크를 뜯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이었다.
의미 없는 대화가 끝나고 윤이 시우의 방을 나갔다. 자신이 무례하게 대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굳는 인우의 표정은 바로 확인하면서 아들이 학원을 계속 다니는지의 여부도 모르는 윤이 어이없었다.
시우가 하나 간과한 점이 있었다. 현을 통해 14층에서 16층까지는 학원도 등록자 외에 엘리베이터 사용이 안 된다는 것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층에서 13층까지는 모두 사무실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어떠한 출입문도 없이 데스크가 보이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로 높게 뻗은 건물 외벽을 쳐다보았다. 지금도 저렇게 위에 있는데 왜 더 위로 가고 싶은 걸까. 저와는 다른 세상이었기에 포기하려고 이해하는 걸 포기하려고 해 봤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상구 계단 문을 열었다. 다행히 비상구는 차가웠다. 패딩을 입지 않고 비교적 가벼운 기모 후드 집업을 입은 자신을 칭찬했다. 이런 데에 춤으로 길렀던 체력을 쓸 줄은 몰랐다. 현의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안해할 것이 뻔해서 계단을 올랐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13층을 오르는 건 더 고역이었다. 현이 쉬는 시간 언제 나올지도 몰랐기에 쉬는 시간 시작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판단해 더 힘들었다. 다행히 시작 3분 전에 도착해서 땀을 숨길 수 있었다.
다시는 이렇게 힘든 일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황함과 고마움이 섞인 현의 얼굴을 마주하자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계단을 모두 올라왔다고 얘기해 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시우가 좋아한 것은 현의 고마워하는 얼굴이지,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표정은 시우와 현 사이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당황해서 얼떨떨해하는 현을 두고 시우는 얼른 계단으로 내려갔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괜히 후드 집업 속 핸드폰을 만졌다. 오늘은 현이 핸드폰을 제출했을까? 그렇다면 밤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루 종일 기대에 차서 무언가를 기다려 보는 경험이 얼마만인가.
여전히 좋은 기분으로 집에 가기는 싫었다. 오로지 현에게 공책을 전달하기 위한 외출이었으므로 지갑도 없었다. 건물 1층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쳐서 오래 있지는 못했다. 어딜 갈까, 생각하다가 한 장소가 시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연락 없이 방문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시우는 두리번거리며 재안을 찾았다. 곧 재안과 눈이 마주치고 재안은 활짝 웃으며 시우에게 다가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그때 친구는? 토요일인데 같이 안 온 거야?”
“친구 학원 갔어요. 안 그래도 얼굴 보고 오는 길에 들렸어요. 집에 가기 싫어서.”
재안은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나이 때 가족이 싫은 건 알지만, 둘밖에 없잖아.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야지.”
“둘밖에 없었으면 해요. 그런데 자꾸 누가 껴서 문제지.”
시우는 인우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때 사장님, 하고 재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재안은 곧 가겠다며 편안한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코라테지? 음, 오늘 시나몬 애플 티로요. 그래, 알겠어. 시우는 그때 현과 앉았던 자리에 외투를 벗었다.
얼마 지나지 않고 재안이 음료를 들고 시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우는 호호 불며 시나몬 애플 티를 홀짝였다. 적당히 찐득거리고 단 맛이 나는 게 불쑥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꼭 자기 닮은 것만 마시네. 승주는 현을 생각했다.
“별일 없는 거지? 학교는 새 학기부터 다시 다닌다며?”
“네. 완전 별로예요. 학교 다니는 것도 다 그 아저씨가 정하고. 아 맞다. 아빠는요?”
아빠라는 단어에 재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게. 나도 요새 못 봐서. 집에도 안 들어오고.”
“친구끼리 싸운 거예요?”
친구라는 단어가 재안의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 걸렸다.
“그냥, 비슷한 거. 엄마랑 요즘 사이는 어때?”
“최악이죠, 뭐. 늘 그랬듯이.”
“왜. 그분은 너 엄청 사랑하시잖아.”
시우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이 자기 남자친구 때문에 아들 꿈을 짓밟아요?”
“흐음. 사정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럴 분은 아니신데.”
“애초에 이혼한 것도 그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뭐? 재안이 놀라 시우를 바라보았다. 재안의 반응에 시우도 덩달아 놀란 표정을 했다.
“아니에요? 엄마가 바람피운 것 아닌가?”
재안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 머그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모습을 본 시우는 궁금증을 거두었다.
“됐어요. 안 궁금해할래.”
“... 이거 하나만은 알아야 해. 그분은 너 정말 사랑하셔. 아끼시고.”
“말을 해야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시우의 말에 재안은 싱긋 웃었다. 가볼게. 점심 맞춰서 집에 들어가. 걱정하실라. 시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안은 그런 시우를 보고 뒤를 돌아 카운터로 걸어갔다. 아빠를 꼭 닮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