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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름 May 28. 2024

천 원짜리 석장의 사치

수세미의 세계

남편이 밖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살이를 취향껏 사는 게 전업주부 입장에서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수세미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고무장갑이나 행주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소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양성이 고, 그릇은 고가인 데다가 짐이 늘어나는 게 싫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일 손에 잡히는 수세미가 낙찰되었고, 그렇게 기나긴 수세미 탐구가 시작되었다.


나의 수세미 역사는 본격적으로 살림에 뛰어든 신혼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수세미가 다양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기능 위주로 수세미를 고르곤 했다. 엄마들이 많이 쓰시는 초록 수세미, 새집처럼 동그랗게 말려 있는 철 수세미, 쓰리엠 스펀지 수세미 이런 식으로 재질에 따른 분류가 일반적이어서 주로 사용하는 식기에 따라 수세미를 구입했다. 가령 유리 제품을 많이 사용한다면 흠집이 덜 나는 스펀지 수세미를 구입하는 식이었다. 뭐 재미있을 게 없으니 크게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년 후, 유하고 있는 텐 주방용품의 갯수가 늘어나면서부터 수세미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자주 사용하던 스펀지 수세미는 거품은 잘 나는데 스텐을 닦고 나면 수세미 냄새가 남는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초록 수세미는 연마제 성분이 들어있어서 비싼(!) 스텐에 흠집을 많이 내니 더더욱 주의해야 하는, 수세미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마침 다이소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 주변에 규모가 큰 매장도 많아지고, 인터넷에서 일본 수입 주방용품들을 전문적으로 파는 사이트도 많아지고 있어서 나는 다양한 수세미의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질의 수세미를 사용해 본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해 본 수세미로는 그물망사 수세미, 뜨개 수세미, 스펀지 수세미(스펀지 위에 아크릴로 덮어쓴 것이나 앞뒷면 재질이 다른 것 등), 일회용 수세미, 그리고 가장 최근에 써 본 압축 수세미가 있다. 천연 수세미와 실리콘 수세미는 아직 안 써봤다.


처음엔 스텐 주방용품을 구할 요량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재미가 들려서 이것저것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보게 된 것이다. 수세미의 위생 문제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교체를 하니 갯수로 따지면 그동안 140여 개 이상 사용한 것 같다.


그물망사 수세미의 장점은 물기가 빨리 말라 위생적이고 수세미 사이에 낀 음식물이 잘 빠진다는 건데, 치명적인 단점이 거품이 금방 꺼지기 때문에 세제를 많이 쓰게 된다는 거다.


일회용 수세미는 한 번 쓸 때 (아까워서 반 칸씩 쓴다) 설거지는 물론 싱크대도 싹 닦고 마무리로 거품 유한락스 조금 뿌려서 배수구까지 닦고 버리면 깔끔해서 좋긴 하나,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된 건 뜨개 수세미이다. 소재와 그립감을 고려해서 내 손만 한 크기의 둥근 형태의 수세미를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뜨개 수세미가 베스트프렌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요게 점점 디자인이 다양해지고 색감도 예뻐지고 급기야 3D 모형 수세미까지 나왔다. 꺅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귀엽고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많다. 심지어 시즌에 맞춰서 준비해 볼 수도 있다. 봄에는 벚꽃모양,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리스 모양, 사계절용으로는 식빵이나 롤리팝 등 무궁무진하다.

설거지용인지 장식용인지 모호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뜨개 수세미 하나로 반복되는 설거지거지의 영역에서 소소한 기분전환을 맞이해 보는 게 즐거워서 계속 뜨개 수세미만 사용해 왔다.


그러다 최근에 딱 한 번 외도를 했는데, 집 근처 이디야에서 행사를 할 때였다. 엑스트라 음료를 마시면 압축 수세미를 1,800원에 살 수 있단다.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살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건데 압축 수세미의 토끼 그림이 귀여운 것이 너무나 내 취향이라 대기업의 마케팅에 당해서 지갑을 열게 되었다.


처음엔 좋았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스펀지 특유의 뽀득-한이 손맛이 있었다. 특히 유리컵을 닦을 땐 스펀지가 유리 표면에 밀착되면서 유리컵 저 너머까지 닦아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일주일도 안되어서 불편해졌다. 컵이나 밥그릇의 입구 부분을 닦을 때는 수세미를 반 접어서 한 바퀴 삭 돌리는 타입인데 스펀지가 두툼하니 그게 매끄럽게 되질 않았다. 래도 엑스트라 음료로 겨우 산 수세미인데 조금 더 써보자며 버텼다.


며칠 뒤, 올레길 9코스를 걷던 중 우연히 들어간 소품샵에서 본 한라봉 모양 수세미가 상콤하고 귀여워서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다. (설거지용 맞나요?) 같이 간 회원 중 한 분은 카네이션 모양 수세미를 구매했다. 아이 학원 선생님 드릴 선물이라고 비닐포장을 요청했는데, 실용적이고 부담 없이 주고받기에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참지 못하고 도넛 모양 뜨개 수세미를 구매했다. 압축 수세미를 버려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오랜 탐구로 발견하고 확고해진 내 취향을 한 번 더 확인는 계기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 수세미를 설거지가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예쁘다는 이유로 무려 3천 원이나 주고 사다니.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그러나 수세미야말로 나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랄까. 나에게 아직 풍부하게 남아있는 소녀감성을 사치스럽게 표현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뜨개 수세미 쇼핑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문구류도 좋아하지만 문구를 쓸 일이 없다. 뭐라도 공부를 해야 하나...)

귀여운 굿즈를 봐도 '에이, 저걸 쓸 데가 어디 있어..'라며 애써 지나가게 되는 삼십대 후반의 주부. 그러나 수세미라면 얘기가 다르다. 내 마음에 들면 자신 있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누워 있고 벌떡 일어나 귀여운 사치품으로 밀린 설거지를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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