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을 싸는데 단무지가 계속 남는다.
그럼 오늘 저녁도 김밥
해마다 요맘 때면 김밥을 싼다. 꼭 요맘때가 아니어도 가끔 싸긴 하지만 학교에 들려 보낼 김밥은 어쩐지 큰 행사처럼 느껴진다.
돌아가신 엄마는 김밥을 참 잘 싸셨다. 소풍날 도시락통을 열면 퍼지던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알록달록 먹음직스러운 색깔의 엄마표 김밥! 비슷한 크기로 일정하게 썰어 담은 모습이 조화롭게 느껴져서, 시금치만 골라내고픈 욕망도 잠재워주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외동딸이니까... 당연히 나도 요리를 잘할 줄 알았다.
신혼 때 호기롭게 블로그 보고 따라 만든 김밥은 애매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뭐랄까. 이도저도 아닌 맛에다가 확 잡아끄는 마지막 킥이 없달까?! 어릴 때 학교 소풍 도시락에서 맛봤던 그 맛이 아니었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참 별 것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집에서 만드는 김밥 재료는 뭐 다 비슷하지 않나?? 김밥용 단무지, 김밥용 햄, 맛살, 시금치, 오이, 당근, 달걀. 여기에 집집마다 우엉이나 어묵 등의 재료를 추가하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했는데?? 각각의 재료를 다 따로 볶고, 볶을 때마다 간을 하고 달걀지단도 곱디곱게 부쳤는데.. 밥에도 소금, 식초, 참기름, 깨 다 넣었는데 그 맛이 안 난다. 이때부터 마지막 한 방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들어가는 노동력에 비해 맛이 부족한 건 억울했다.
김밥 자주 싸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어묵을 좀 간간하게 볶아서 넣어보란다. 예전보다는 맛있어지긴 했지만 내가 생각한 그 맛이 아니다.
교리김밥집처럼 지단을 얇게 부쳐서 왕창 넣어봤다. 이것도 맛있긴 하지만 역시...
유튜브를 보니 오이를 새콤하게 절여야 한단다. 밥도 간을 좀 더 쎄게 해야 한단다. 김도 네 번이나 구웠다는 김으로 사봤다. 아이 어린이집 행사, 가족 소풍, 그냥 먹고 싶어서(!)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으나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지막 한 방을 찾아낸 그날은 작년 요 맘 때. 집김밥 맛탐구의 여정이 어언 8년이 흐른 뒤였다. 평소에 잘 가지 않던 롯데마트에 가서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현장체험학습용 김밥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그때 흔한 김밥용 햄 바로 옆에 진열된 그것을 보았다. 김 크기에 맞추어 길고 납작한 남색 포장지 위에 노란색으로 '김밥용 스팸'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저건가.
맨밥에 그것만 올려도 맛있는 스팸을 김밥에 넣으면 어떨까. 맛있는 거 옆에 맛있는 거?? 아이도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스팸 먹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절반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김밥용 스팸을 카트에 넣었다. 결과는 말해 뭐 해. 마지막 한 방은 '대기업의 맛'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김밥 싸는 게 즐거워졌다. 김밥 비법 안 알려주고 가버린 엄마에게 속으로 툴툴대지도 않는다. 내가 싼 김밥이 맛있어서 학원 하는 친구에게 싸다 주기도 한다. 공식행사가 아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김밥을 싸는 것 같다.
재료도 점점 심플해졌다. 제주당근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팬이 주황색이 될 정도로 볶아주고, 달걀지단에는 모올래 '연두' 한 방울을 첨가한다. 그리고 설탕과 식초 1:1에 한 시간 절인 오이, 단무지, 마지막으로 스팸. 이 다섯 가지가 끝이다. 이 조합이 최적으로 맛있다. 모든 것은 스팸으로 통한다.
하나 고민이 있다면 자꾸 단무지가 남는다는 것이다. 김밥용 단무지 한 팩과 김밥용 스팸은 개수가 맞지 않아 싸다 보면 꼭 단무지가 남는다. 김밥이 아니면 단무지를 잘 먹지 않는 집이다 보니 남은 단무지는 애물단지가 된다. 그럼 단무지를 두 개 넣고 싸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짜다. 최적의 맛에서 벗어난다.
차라리 그럴 땐 스팸을 하나 더 산다. 계란은 늘 집에 있으니 지단도 넉넉히 부친다. 그러고 김밥을 또 싼다. 이렇게 김밥 이어달리기가 시작된다. 단무지가 건넨 바통을 스팸이 이어받고, 그 스팸은 또 단무지에게로 바통을 넘긴다.
사흘 째 되는 날도 김밥을 싸는데 드디어 남은 단무지 개수와 스팸의 개수가 딱 맞았다.
오! 이제 그만 쌀 수 있겠다. 솔직히 슬슬 물렸는데... 여기에 오이 개수까지 딱 맞으니 더할 나위 없다.
맛있지만 번거롭고, 아이에게 시금치를 먹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지만 스팸이 들어 있기 때문에 건강에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는 애증의 내 김밥.
맛있었다. 조만간 또 보자!
** 글쓰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입니다. 사랑의 라이킷과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