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벚꽃 개화 시기를 알려주고 주차해 둔 차 위에 뽀얗게 송화가루가 내려앉아도.
언니들이 고사리 꺾으러 가자고 연락을 해와도.
나는 봄이 왔음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은 아직 내복도 입고 다닌다.) 나의 봄은 다른데에서 온다.
바로 오늘이었다. 식구들이 출근하고 등교한 후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안마의자에 앉았는데 눈앞에 올 해의 첫 날벌레가 느릿느릿 지나간다. 마치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기력이 없다는 듯 날갯짓이 위태롭다.
종량제 봉투 10리터짜리로 바꿔야겠네. 비로소 봄의 시작이다.
신혼 초, 처음 내 살림을 시작할 때 식구가 둘 뿐이니 종량제 봉투는 10리터짜리를 구매했다. 맞벌이 2인 가구에게는 그마저도 컸다. 겨울엔 괜찮았지만 날씨가 따땃해지면 열흘 넘게 두고 쓰는 종량제 봉투에는 날벌레가 모여들었다. 치킨뼈를 작은 비닐에 꽁꽁 싸매고 하드 막대기는 대강 씻어서 버려도 마찬가지였다. 칙칙 뿌리는 '초파리 기피제'를 항상 종량제 봉투 옆에 두고 지내다 임신과 출산을 지나오며 아기 호흡기에 안 좋을까 싶어 사용하지 않게 되었더니, 날벌레의 출현은 봄의 신호탄이 되어버렸다. 종량제 봉투는 작은 거, 무조건 작은 거 사서 빨리 채워서 빨리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 왔다. 빠른 배출을 위해 꾹꾹 눌러 담지도 않았다.
제주도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5년 전, 제주도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자율포장대도, 종이박스도 없었다! 안내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박스가 제공되지 않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없었다. 별 수 없이 종량제 봉투를 한 장 구매해서 거기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10리터는 대형마트에서 낱장으로 팔지 않기 때문에 20리터를 구매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장바구니를 미리 챙기는 습관이 생기기 전까지 종종 구매한 20리터가 집에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10리터짜리만 쓰는데 20리터가 자꾸 생기니 애물단지였다. 남편이 집 앞 마트에서 맥주와 과일을 사서 20리터에 들고 들어오면 남편과 물품만 통과시키고 종량제 봉투는 현관에서 돌려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코로나가 닥치고 말을 줄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 계산 후 점원이 자연스레 건네는 20리터를 번번이 '그거 말고 10리터요'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주는 대로 받아왔다. 그렇게 몇 달 받아왔더니 집에 20리터 종량제 봉투 풍년이 들었다.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 한겨울까지 기다렸다. 중간에 못 참고 당근에 팔까 고민도 했지만, 물건을 담았던 거라 아무리 착착 접어도 후줄근해 보였는데 그런 봉투를 누구한테 파냐 싶어서 관뒀다.
모기도 안 나타나는 한겨울이 되어(제주도는 11월에도 모기가 보인다.) 드디어 20리터를 개시했다. 날벌레가 쓰레기통 안팎에 번식하는 게 싫어서 평소에도 쓰레기통 없이 종량제 봉투만 놓아두기 때문에, 입구를 바깥으로 돌돌 말아 바구니처럼 모양을 잡았다. 10리터짜리의 두 배 용량이니 입구도 두 배로 커 보였다.
그렇게 한 두 번 20리터를 사용해 보니 어랏, 이거 꽤나 편했다. 10리터짜리를 사용할 때는 초딩 아들이 사탕 껍질이며 입 닦은 물티슈 등을 휙 던지다시피 버리니 봉투에 쏙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종량제 봉투 주변을 정리하며 아들에게 쓰레기 좀 봉투 안에 제대로 버리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20리터를 사용하니 그럴 일이 없었다. 무심히 툭 버려도 20리터는 묵묵히 받아주었다.
컵라면 먹은 것도 빠작빠작 뿌개지 않고 편하게 버릴 수 있었고, 나무젓가락이나 빨대를 반토막 내지 않고 그냥 버려도 봉투를 뚫고 나오지 않았다.
사나흘이면 내버려야 했던 것을 일주일 넘게 두고 쓸 수 있으니 그것도 편했다. 그렇게 겨우내 나의 애물단지는 서서히 보물단지로 변해갔다. 그동안 10리터만 고집해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봄이 왔고 날벌레도 왔다. 20리터가 편했는데 코딱지만 한 10리터를 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찮다. 하지만 날벌레가 번식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 어쩔 수 없지. 하다못해 봄가을용으로 15리터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질척대 본다. 10리터는 작고 20리터는 크다.
** 글쓰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입니다. 사랑의 라이킷과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