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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아이 러브 뉴욕

by 인디라이터 호

지루함은 습관처럼 엄습해온다. 잘 가던 길은 가끔이유도 없이 불안해져 온다. 살아있는 삶은 늘 문제를 동반한다. 어딘가여기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잠시 시간의 허리를 메어 주어야 한다.그 해 가을도 그랬다. 결혼 후 3년이 지나지않아 나는 갑자기 익숙했던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삶의 현실 어디쯤에서 나를 위한 숨구멍을 틔워주어야 했다. 두 기업과의 출강 계약이 거의 종료될 즈음이었다. 같이 살다 이태원으로 독립한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여행갈까?”


무엇이 그녀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켰는지는 모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좋아, 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 준비는 시작되었다. 실은 나는 여행 준비를 했고그녀는 아무런 계획을 하지 않았다. 그저 떠날 날과 돌아올 날에 맞춰 비행기 표를 끊었을 뿐.


가기 전날 밤까지 험난한 일상을 마무리해야 했다. 밀린 서류들과 업무 메일을 보내고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가량 이어질 여행에 대비해 뭉툭한 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갖은 음식을 준비해 소분하고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었다. 턱 밑까지 흘러 내린 얼굴 근육을 부여 잡고 밤 비행기에 올랐다. 여동생과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남편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서재 서랍에 구겨져있던 달러 봉투에서 약간의 여비를 챙겨 주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며 앞으로의 자유를 기대하는듯 했다.


뉴욕 가는 길, 아직은 벌떡 일어나지 못한 나의 영어 본능을 조금 더 깨우고자 휴 그랜트가 나오는 어바웃어보이를 틀었다. 자는지 조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이어가며 클래식 채널에 맞추어 귀를 뉘었다. 이렇게 저렇게 몸을 비틀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을 무렵 이제 다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설렘을 가득 안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압도적 스케일의 인천 공항에 대한 여운 때문인지 존 F 케네디 공항이 그닥 대단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애니 웨이, 우리가 뉴욕에 왔도다.’


내 계획은 허드슨 강이 보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에어비앤비에 해당되는) 고층 숙소에서 장기 투숙을 하는 거였다. 거기 머물면서 오전에는 맨하튼에 있는 어학원 비즈니스 과정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여행을 하는 거였다. 하지만 동생의 뜻은 달랐다. 여행을 계획하지 않고 (마치 재즈처럼 즉흥적으로) 그때 그때 숙소를 잡아 투숙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거금을 들여 간 뉴욕이었지만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기에 내 마음을 접고 그녀의 계획에 동참했다.


첫 번째 머물 곳은 센트럴 파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인의 집이었다. 한국 평수로 족히 80평은 되어 보이는 고급 아파트였다. 마돈나를 비롯해 많은 유명인들이 뉴욕에서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부자 동네 부자 집이었다. 그 집 주인은 재일교포 언니였는데, 나와는 친분이 없고 동생이 절에 다니며 알게 된 분이었다. 남편도 재일 한국인으로 최배달의 후예로 가라대 무술을 체계화하여 일본 전역에서 도장 프랜차이즈를 하며 도쿄 중심지에 상당한 재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널직한 집 안은 고급 가구로 장식되어 있었고 맨하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들 한 명과 그녀의 한국인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빌려 쓰며 신세를 지는 부담이 나는 조금 싫었지만, 동생 덕분에 이삼 일 머물 곳을 안내 받았으니 그냥 감사하기로 했다. 다과도 대접 받고 뉴욕의 명소들을 안내 받으며 첫 뉴욕 살이가시작됐다. 내려 앉은 것 같던 얼굴도 하루 이틀 지나며 차차 탄력을 회복해갔다. 자, 이제 뉴욕 여행만 하면 될 일이다.


뉴욕은 마치 커다란 놀이 동산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맨하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뮤지컬 무대 같았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고 유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층 건물들 사이를 아침 저녁으로 걷노라면 ‘와우’ 라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왔다. 나름 넉넉하게 준비해 둔 체크 카드 잔액과 신용 카드 한도면 든든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여독을 풀고 호텔 비딩 사이트로 들어가 다음 이삼 일을 묶을 호텔을 예약했다.맨하튼 중심에 있는 곳이었다. 내 몸무게를 능가하는 무거운 짐을 낑낑 들고 숙소를 옮겨처음으로 향한 곳은 랄프 로렌이며 까르띠에, 티파니 등 온갖 명품들이 즐비한 5번가였다. 잘 차려 입은 근사한 벨보이가 눈인사를 건네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런 물건은 늘 뇌 회로에 자극을 가해 내 인생이 이만하면 괜찮다고 느끼게끔 해준다. 가격표를 보니 처음부터 쇼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신나게 아이쇼핑을 즐겼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거리는 온통 물건의 생명력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 빛에 힘입어 나의 생명력도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일대에 있는 모든 상점들을 구경하고 어느 방향으로 흘러 쪼개질 듯한 다리를 부여잡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식당에 들어 갔다.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식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각종 스테이크를 시켜 노곤한 몸을 충전시켰다.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밤 또한 허투루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동서남북이 뒤바껴 그렇지 않아도 길을 찾는데 맹한 나와 달리 동생이 이리로 가면 그곳이 나온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타임스퀘어였다. 전 세계의 모든 광고판이 현란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걷다보니 도무지 영어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언어의 관광객이 많았다. 타임 스퀘어광장에 앉아 한 손에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근래에 보는 가장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출발하기 전 급하게 펌한 머리가 얼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부츠를 신고 멋부리느라 다리가 쪼개질 듯 했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그 밤이 그냥그대로 좋았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니까.


그렇게 이삼 일을 호텔에서 묶고 높은 물가와 숙소 비용을 아끼려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한인 타운 근처에 있는 붉은 벽돌색 아파트 2층을 임대한 곳이었는데 방마다 벙커 침대가 두 개씩 있는 아늑한 숙소였다. 게스트 하우스는 미란이란 이름을 가진 매니저가 대신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몇 년 전 뉴욕을 여행하고는 이곳에서 너무 살고 싶어져 한국 생활을 청산하고 대학원 공부와 게스트하우스 매니저 일을 병행하고 있는 새내기 뉴요커였다.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동향 출신의내 동생과 나이가 비슷했던 기억이 난다. 갓 뉴욕에 입성한 촌뜨기 두 자매에게 갖가지 실용적인 뉴욕정보들을 주었고 그곳에서 머무는 마지막 밤 우리는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변신하고는 나이트 클럽을 갔다.


입구부터 줄이 길게 늘어선, 당시로서는 가장 유명한 곳 중 한곳이었는데, 남녀 모두 한껏 드레스 업을 해서 엄청 놀랐다.마치 프롬에 오는 듯 한껏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홀 한 켠 드러머의 미친 듯한 퍼포먼스는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배가시켜 주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와 그 친구들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도 클럽 데이가 유행이라 금요일 밤이면 팔찌를 끼고 홍대 일대 클럽을 순회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그 날 밤 우리들의 클럽 데이는 차원이 다른 열기의 폭발이었다고나 할까. 카카오 스토리로 실시간 업로드를 하던 나에게 내 아줌마 친구들은 ‘아줌마 자중하라’는 염려와 부러움 섞인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다른 곳 다른 시간 다른 경험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된다. 쌀쌀한 거리를 뚫고 대략 핼러윈 데이에 들른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뉴욕 클럽 데이는 가무를 즐길 줄 아는매력적인 동생들과 무사히 종료되었다.


약간의 숙취를 모닝 커피로 달래며 그 다음 날 우리는 공기 마저 고급져 아직도 머리 속에 길게 여운이 남아 있는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과 모마 미술관을 갔다. 그리고는 센트럴 파크에서 마차도 타고, 캐리 브래드쇼와 빅이 데이트를 하던 까페에 들러 밀크티와 스콘을 먹으며 나란이 신문을 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는노부부를 한참 쳐다 보기도 했다. 나도 남편과 저렇게 늙어야지 상상하면서.


아래로 아래로 걷다 우연히 들른 소호 거리 네스프레소 까페에서는 여행으로 지친 두 다리를 쉬며쇼핑 물품들을 다시 꺼내 보기도 하고 당시로서는 안먹고 오면 반칙이라는 셱셱 버거에 들러 버거와 밀크 셰이크를(아무리생각해도 부조화스러운) 먹으며 칼로리를 충전하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이랴!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별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지 않고 (잠깐 뉴저지를 왔다 갔다 한 것 빼고는)이른 아침이면 벼룩 시장에 들러 한국에서는 보기도 힘든 희귀한 패션 아이템들을 득템하기도 하고, 낮에는저렴하게 구입한 뮤지컬 티켓을 들고 라이온 킹이며 시카고와 같은 작품들을 오리지널로 감상하기도 했다. 잊고지낸 기억이 이렇게나 생생히 살아 있는 걸 보면 뉴욕은 정말이지 매직 시티임에 틀림 없다.


맨하튼에서의 여행이 지루해질 무렵 가판대 신문에서 크루즈 여행이 눈의 띄었다.


크루즈 크루즈 크루즈!


크루즈 여행은 모든 여행자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콜라한 캔에 5달러나 하던 당시로서도 비싸던 뉴욕 물가에 비해 버지니아와 바하마를 거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일주일 간의 왕복 여행이 인당 600불 정도여서 동생과 나는 속으로 ‘아싸’ 쾌재를 부르며 그닥 길지않은 영어로 어렵게 크루즈 신청을 했더랬다. 크루즈가 떠나던 부두에서 승선 준비를 하며 ‘여기에는 또 다른 뉴요커들이 모이는군’ 생각했었는데, 세련되고 바쁜 그리고 가끔은 불친절한 뉴요커들과 달리 어딘가 모르게 외모부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푸근한미국인들이 긴 줄을 늘어뜨리며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 있겠는데?’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햇볕은 눈부셨고 커다란크루즈 배 위에 앉아 태양과 바다를 동시에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선 내 객실은 너무 넓지도좁지도 않아 쾌적하게 지내기에 충분했고 24시간 열려 있는 부페와 동남아 출신의 크루즈 직원들은 너무친절하고 유쾌해서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낮이면 수영복이며 짧은 여름 의상으로캐주얼하게 지내던 크루즈 손님들이 밤이면 모두 턱시도와 드레스를 한껏 차려 입고 선 내에 있는 여러 식당에서 매일마다 식사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는 모두 가라오케나 포켓볼 클럽, 그리고 나이트클럽으로 발길을옮긴다는 거였는데 매일 저녁 주름 잡힌 옷을 입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하리?


뉴욕은 ‘멜팅 팟’ 섞이고 융화되는 것이 일시적 뉴요커의 자세 아니겠는가? 나이트 클럽에서는 밤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흘러 나왔고 거기 모인 모든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흥겹게 오리지널 말춤을 추며 밤이면 밤마다 같은 얼굴로 모이곤 했다. 똑 같은루틴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정말 지겹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바로 태풍이었다.


뉴욕을 포함한 미 동부 지역에 태풍 샌디가 몰아 닥쳤다. 바다위 배는 위태롭게 출렁거렸고 크루즈 행선지인 목적지들이 중간에 취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지겨워지기시작했는데 나머지 시간을 꼼짝 없이 배에 갇혀 지내야 했다.


‘오 마이 갓!’


밤이 낮 같고 낮이 밤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파도가 무섭게 몰아쳤지만 큰 여객선이라 위험을 감지할 만한 미동은 없었던 것 같다. 짬짬이 텥레비전으로 보는샌디의 위압은 조금씩 불안감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미동부를 아우르는 태풍의 경로가 자칫하다가는 크루즈여행이 끝나는 날 뉴욕을 제대로 강타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뉴스가 들려 왔다. 큰일이었다. 왜냐하면 여행이 종료됨과 동시에 우리는 이틀 정도를 맨하튼에 더 머문 후 출국을 예정했기 때문이다. 당장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물 설고 말 설은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체류비를 지불해가며 더이상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들을 동원해 지루한 시간들을 버티고 마침내 우리가 승선한 8번 부두로 배는 정박했다. 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풍이 그 위세를 몰라 제대로 뉴욕을 강타할 채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배에서 내려 일주일 간 느끼한 음식으로 목숨을 연명했던 우리는 서둘러 한인 타운에 있는 한식당으로가 김치 찌개를 시켰다. 시큼한 김치에 숭숭 썰어 넣은 돼지고기가 얼마나 구수하고 진한지 한국에 있는김치 찌개집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날 저녁부터 태풍 샌디의 영향으로 모든 지하철운행이 중단된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어쩌지 이제?’


흥겹게 머물렀던 민박집 미란에게 연락을 해보니 예약이 꽉 차서 방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맨하튼 중심에서 머무를 곳을 찾아 봤지만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았다. 누가했는지 뉴저지에 있는 힐튼 호텔을 예약했고 한국인 기사가 운전하는 콜 택시를 불러 간신히 호텔에 도착했다.


‘아뿔사’


예약할 때는 아무런 코멘트가 없었는데 도착 하기 바로 직전 호텔 전체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다고 리셉션 직원이 말해 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우리는뉴욕 거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핸드폰이나 노트북 사용이 너무나 중요했다. 전기 공급으로 인해 연락 수단을사용할 수 없는 일은 없어야 했다. 왜냐하면 모레 아침이 출국이었기 때문이다. 앞이 캄캄해져 왔다. 다른 숙소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여서 발을 동동구르던 차에 그래도 여기서 머물 수는 없다며 인근에 숙소가 없는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뉴저지 숙소들을 마구마구 검색했다. 한 군데가 눈에 띄었다. 비용이 나쁘지 않았고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인(Inn)이었다. 다행히 전기 공급도 중단되지 않았고 빈객실도 있다고 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이제는 여러 기념품과 쇼핑한 물건으로 불어날 대로 불어난무거운 짐을 들고 인도 사람이 한다는 다음 숙소로 폭우를 뚫고 내달렸다. 환하게 켜진 밝은 불빛이 마침내 안도감을 주었다. 됐다. 여기서 짐을 풀고 버티면 될 일이다.


숙소는 영화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오래된 우드 프레임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고 한 눈에도 연식이 낡아 보이는 소파와 텔레비전, 그리고 꽃무늬가 어딘가어색했던 커튼이 드리워진 나쁘지 않은 방이었다. 인도 사람이 운영하는 숙소에는 처음 머물러 보았는데 직원들(그래 봐야 한 두 명이지만) 도 친절했고 리셉션 옆작은 테이블에는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커피 포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창 밖 폭풍우는 그 날 밤도 너무나 매섭게 몰아쳐 거리의 나무를 뽑고 전신주를 나무 젓가락 마냥 부러뜨리며온 동네와 도시를 다 삼킬 듯 매서운 눈물 소리를 내며 불어 닥쳤던 것 같다. 노곤한 몸이 더는 아무것도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자꾸만 침대 속을 파고 들었다. 그렇게 재난 영화 한 가운데서 윙윙거리는 텔레비전 소리를 뒤로 하고 잠에 깊이 빠졌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충전된 핸드폰을 켜자마자 항공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태풍 샌디로 인해현재 존 F 케네디 공항을 폐쇄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현실이 되지 말아야 할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그 실망감과 당혹스러움이란. 공항 폐쇄 뿐만 아니라 태풍 샌디가 완전히 소멸되어 영향력이 없어질 때까지 모든 비행 스케줄은 잠정 연기된다는 내용이었다.


‘잠정 연기…’


의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연고도 없는 관광객인 우리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숙박을 더 연장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도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자연의 힘이 우리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순간, 우리가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버텨야 할 뿐.


아침으로 먹은 커피 한잔과 식빵 두 조각에 속이 쓰려 왔다. 레스토랑이없는 숙박 시설이라 이제는 끼니를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 한국의 모든 배달 음식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친절한 리셉션 직원에게로 가 혹시 배달 가능한 음식점이 있냐고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국식 피자 가게와 신기하게도 중국 음식점 전화 번호를 건네 주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피자 가게로 먼저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지만 태풍이 심해 배달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걸고 중국 음식점으로 전화를 했다. 너무도 유쾌하게 배달이 가능하니 주문을 하라고 중국인 직원이 유창한 영어로 말해 주었다.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 중 이것저것 그리고 내일 먹을 요기거리도 포함해 여러 가지를 시켰다. 배달의 민족은 중국이던가? 그날도 비와 바람은 지축을 뒤흔들 정도로 매섭게 몰아 쳤지만, 그것이 대수냐는 듯 날렵하고 잽싸게 생긴 중국인 아주머니가 오토바이를 타고 폭풍우를 뚫고 와 배달을 완료해 주었다. 그 영화 같은 장면에서 나는 중국인의 저력, 강력한 삶의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나로써는너무나도 다행인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체류는 며칠 더해졌다. 온 종일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항공사의 한국 사무소가 문을 열 시간을 기다려 연결되지 않는 통화에 발을 동동 구르며 수 차례 전화하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저렇게 태풍은 여세를 약화시키며 꼬리를 감추었고 공항에 모든 운행이 정상화된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는가까스로 비행기에 올랐다. 이런 여행은 두 번 다시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며……


모든 여행에 크고 작은 해프닝이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뉴욕 여행의 마지막은 너무도 강렬해서 뉴욕에서의 모든 크고 작은 기억들을 덮어 버렸다. 우리의 체류가 예상보다 더 길어지며 미처 생각지 못한 체류 비용을 매일 지불해야했고, 무엇보다 한국에 돌아온 한 달 후 통신사에서 날아온 고지서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번 달 납부할 요금은 60만원 입니다.’


공항이 해제되고 난 후에도 밀린 여행객들로 비행기 좌석 컨펌이 쉽게 나지 않아 다급한 마음으로 통화가 연결되기를 바라며 하루 수 차례 내선 번호를 누르며 기다린 시간에 대한 인정사정 없는 통신사의 고지.놀란 가슴을 부여 잡은 채 (여행 후 좀 더 가난해진 나는) 납부 금액을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는 통사정이 먹히지 않자 3개월분납을 요청하며 나의 뉴욕 여행을 마무리 한 것 같다.


삶에서의 일탈은 힐링이 될 만한 근사한 경험과 어느 때든 꺼내볼 수 있는 좋은 추억,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더 이상의 단조로움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얘기치 않은 에피소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이제는 접혀진 시간을 풀어야만 볼 수 있는 시절들이 그립고 또 그리워지는 밤이다.


서재 한 켠에 놓은 서고에서 여전히 웃고 있는 짝이 맞지 않는 나의 토리 버치 구두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신어본 후 물건을 확인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집 까지 들고 온 내 잘못이리라.


가장 어메이징한 도시 뉴욕, 너를 곧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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