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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Nov 05. 2023

어설픈 김장콤비

“셋째 며눌아. 아랫방 배추 썩는다. 김장을 해야 할 낀데.”

“네~~ 아버님, 이제 김치도 많이 안 드시고 사드셔도 되는데….”

“아이가! 배추가 저리 많은데 사 먹을 일이 뭐가 있노.”

“아~아~~그럼 그럼 날짜 함 조정해서 내려갈게요.”

시골에 안부 전화 드렸다가 졸지에 김장하게 생겼다. 어머님을 쓰러지게 한 그 징글징글한 김장. 우리 식구는 한동안 김치 먹기도 싫었는데 아버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배추 수십 포기를 아랫방에 쌓아놓으셨다.


평생 하셨던 일을 무 자르듯 없애는 게 얼마나 허전하고 불안할까 하는 마음도 잠시, 김장 준비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얻어먹을 줄만 알았지 한 번도 내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친정엄마 계실 땐 친정에서 얻어먹었고, 엄마 떠나신 뒤로는 시어머니의 묵은지로 근근이 버텼다. 요즘엔 절임 배추도 사고 양념도 사고 간단히도 하던데 그 많은 양념을 언제 만들고 그걸 언제 다 치대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다시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님, 양념은 제가 다 준비해 갈게요. 그런데 절이는 게 고민이에요.”

“아이가, 그건 내가 한다. 다 절여서 준비해놓을꾸마. 걱정 마라.”


배추 절이는 게 김장의 반이라고 했다. 그게 해결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고춧가루, 마늘, 생강은 도대체 얼마나 준비해야 하지?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정리하고 머릿속으로 외웠다. 전통시장에서 재료를 하나씩 살 때마다 귀동냥도 제법 했다.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해졌다. 그 많은 배추를 어설픈 솜씨로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배추 서너 포기로 예행연습까지 했다. 남편은 서현 엄마가 하는 건 다 맛있다는 둥 힘쓰는 일은 몽땅 자기가 할거라는 둥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땅땅 쳤다.     


금요일 밤늦게 도착한 시골집엔 아버님이 들뜬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절여놓은 배추가 얼까 봐 비닐로 몇 겹을 싸고 두꺼운 이불로 덮어놓기까지 하셨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시작할게요. 아버님 걱정 마세요.”


과연 저 배추를 맛있게 담글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을 설쳤다. 이른 새벽 눈이 저절로 떠졌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김치 담그기에 돌입했다. 양파, 당근, 무 채썰기를 시작했다. 작은 손으로 큰 무가 감당이 안 됐다. 손가락에 힘을 잘 못 주니 팔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옆에 앉으며 뭘 하면 되냐며 팔을 걷어붙였다. 이럴 땐 어설픈 노동력도 큰 도움이 된다. 남편 채썰기 실력은 나무젓가락만 한 굵기다. 괜찮다. 소금 넣고 시간 지나면 다 쪼그라들어 가늘어질 것이다. 고춧가루에 액젓, 마늘, 생강, 설탕을 넣고 배도 갈아 넣었다. 걸쭉한 찹쌀죽도 끓여 식히고 쏟아부었다. 썰어놓은 채소에 양념을 몽땅 넣고 비비자 그럴듯한 색깔이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는데 이상하다. 이 오묘한 맛을 무엇인가. 액젓을 더 넣어야 하나? 들이붓자. 아! 짜다! 설탕을 더 넣자. 그런데 짜고 달기만 하네. 이걸 어쩌나, 양파를 갈아 넣자. 자꾸 이것저것 넣다 보니 양념이 산더미만큼 쌓인다.

이상하네! 뭐가 빠졌나. 레시피를 보는데 아뿔싸! 생새우를 놓쳤구나.

남편을 산청읍으로 급파했다. 간 김에 생굴도 사라 했다. 솥뚜껑만 한 손을 가진 남편은 그 비싼 새우랑 굴을 많이도 사 왔다. 좋은 거 많이 넣으면 맛나겠지. 새우를 넣었더니 감칠맛이 좀 난다. 아버님은 짠 걸 좋아하니 소금을 더 넣자. 붉은빛에 윤기가 좌르르 그럴싸해졌다. 휴~~ 이제 허리 한번 펴자.

내가 양념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아버지와 남편도 바빴다. 소금물 속 배추를 건져 일찌감치 물을 빼고 있었다.


“오늘 을동댁네 김장하나 부네.”

대문이 활짝 젖혀지더니 동네 아지매 서너분이 들이닥쳤다. 주부 베테랑들이 오니 일이 척척 진행됐다.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마루에 비닐을 쫘악 깐다. 시아버지는 배추를 마루로 나르기 시작했다. 빨간 고무장갑 여럿이 배추 이파리 사이사이로 양념을 눈깜짝할 사이에 넣는다. 내가 한 포기 할라치면 동네 아지매들은 서너 포기를 하는 속도였다. 큰 김치통 8개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불현듯 김장하는 날 손님 대접이 걱정된다. 돼지 목살 서 근인데 적으려나. 고기를 삶아 내고 굴 넣은 배추겉절이를 함께 내니 한 상 거뜬히 차려진다. 그 사이 아버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며느리 수발에 바쁘셨다.

동네 아지매들이 철수한 후 김장 뒷설거지에 돌입했다. 언제 저 벌건 통을 다 씻지? 남편과 내가 씻어내면 아버님은 통들을 정리하셨다. 마루 뒷정리도 아버님 몫이었다.


주위는 진즉에 깜깜해졌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상을 물리니 밤 8시가 넘었다. 아침 8시부터 꼬박 12시간이 걸린 대행사였다.

아버님께 김치 냉장고를 열어 보이며 묵혀 먹는 김치, 금방 먹어야 할 김치, 그리고 남은 양념의 쓸모를 가르쳐드렸다.

“됐다. 그만하면 됐다. 겨울은 나겠다.”

아버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가득했다. 시아버지의 겨울맞이 채비가 드디어 끝났다. 수십 년 어머님의 일을 올해는 아버님이 하셨다. 그것도 가장 어설픈 며느리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아버님의 김장 고집은 한동안 더 지속했다. 몇 번의 난리 후 또 김장철이 다가왔다.

“아버님, 올해 김장은 어떡할까요?”

“이제 고마해도 되겄다. 우리가 얼마 먹지도 않고, 작년 김장도 아직 그대로 있고, 너거도 너무 힘들고.”

“예? 아버님 서운하지 않으시겠어요?”

“됐다. 그만하면 됐다.”

그런데 왜 내가 서운한가. 시아버지와 나만의 오붓한 행사를 뺏긴 것 같은 이 기분.      


아버님 병원에 입원하시고 마지막으로 힘겹게 했던 말도 김장이었다.

“며눌아, 김치냉장고 김치 서울로 다 들고 가라. 그거 다시는 못 먹을 것 같다.”   
  

아버님 떠나신지 5년째,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돌아왔다. 김장하러 시골집 내려간다는 친구들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짭짤한 아버님표 절임 배추에 어설픈 며느리표 양념의 그 오묘한 조합의 김치가 오늘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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