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걱정해야 할까요? 이 두 가지 고민은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짜장면과 짬뽕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죠. 무엇이 더 맛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고뇌가 깃들어 있습니다. 결국 무엇을 고르던 행복할겁니다.
생후 1년이 되었을 때, 아이의 장래를 점쳐보기 위해 돌잔치를 진행합니다. 아이가 집는 물건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진행자의 의도가 살짝 얹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잡이는 시대적 가치관을 반영하는데, 과거에는 쌀(재산), 실(긴 삶), 대추(자식 번성), 떡(튼튼), 바늘(손재주) 등이 올라왔다면, 지금은 청진기, 마이크, 축구공 같은 직업적인 물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돌잔치는 아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진행한 유쾌한 행사이긴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아이의 먼 미래를 점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로서는 자녀의 삶을 걱정하며 그 불안한 마음을 웃음으로 전환하고 싶어 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설령 아이가 판사봉을 잡았다고 해도 그 아이가 실제로 판사가 될 확률은 몇 퍼센트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마치 남녀 성별처럼 직관적으로 "이 아이는 이런 재능이 있으며, 이런 직업이 어울립니다"라는 정보를 주는 포춘 쿠키처럼요. 그렇게 된다면 사교육의 의미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 잔혹할 수도 있지만, 선택지가 많아도 마찬가지로 잔혹한 상황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많은 직업 중에서 우리 아이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 무엇이 잘 맞을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저 자신도 아직 직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연필을 잡았지만, 공부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습니다. 또한 스포츠에도 전혀 재능이 없었죠. 축구공이 날아오면 무서워서 도망치기 일쑤였고, 부모님은 저의 운동신경을 키우기 위해 농구와 수영장에 보내셨지만 평균 이하의 성적만 유지했습니다. 잘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칭찬도 줄어들고 흥미를 잃게 되었죠. 그렇게 제게 흥미를 잃게 한 것들은 수천 가지에 이릅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칭찬받았던 것은 바둑과 미술이었습니다.